마음이 어디가 아픈가
상태바
마음이 어디가 아픈가
  • 임영호 칼럼
  • 승인 2016.08.26 11: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영호 인문학 노트] 책 속에서 길을 찾다
▲임영호 코레일 상임감사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란 책머리에 시인 김수영을 꺼낸다. 시인 김수영은 그의 시속에서 솔직하고 정직하게 자신을 그렸다. 저자는 솔직함과 정직함이 인문정신의 핵심이라 여기면서 독자들에게 이런 마음의 태도를 먼저 권하는 것 같다. 어디가 아프다고 말할 때 메스를 들이대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인생은 무엇인가’하며 끊임없이 묻는 것이다.

이 책은 크게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첫 번째는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라는 인간 개인의 모습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나와 너의 사이’라는 다른 이와의 관계, 세 번째는 ‘너와 나를 포함한 사회’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철학자는 무려 48명이나 된다. 나는 아직 배움이 짧기에 이들 철학자의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어떤 책보다도 일상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였기에 철학이 딱딱하고 어려운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움추린 인간에게 큰소리로 허리를 펴라고 말한다

《니체,「차라투스트라라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를 꿈꾸며 사는 사람만이 자신을 옥죄고 있는 담벼락과 조우할 수 있을 뿐이다. 자유로운 것 같지만 갇혀 있다는 사실, 제한된 것만을 하도록 허락된 자유, 이렇게 허구적인 자유를 긍정할 수 있겠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영원히 고정되어 있어서 바뀔 수 없다고 상징된 것이야말로 인간을 가로막고 있는 담벼락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상징적으로 이것을 ‘신’이라고 하고 망치로 부수겠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어쩌면 독수리 같은 멋진 존재였는데 던져준 모이를 쪼아 먹으며 날개가 퇴화되어 닭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존의 관념과 사상, 관습, 평판에 매여 사는 것이다.

니체는 지금 이 순간의 행위가 영원히 반복 된다는 영원회귀(永遠回歸)라는 말로 지금 인생을 다시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라고 가르친다. 지금 노예의 굴종과 비겁을 감내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노예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고, 지금 주인의 당당함과 자유를 쟁취한다면 영원히 주인으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라고 말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처럼 어떤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인이 되라는 뜻이다.

맨 얼굴 관리가 중요하다. 《에픽테토스,「엥케이리디온」》

에픽테토스는 페르소나와 맨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을 간파한 철학자이다. 다시 말해 페르소나에 집착하다가 맨얼굴을 망각하거나, 혹은 맨얼굴에 신경 쓰다가 페르소나를 경시하는 것, 이 두 가지 극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성찰로 인해, 우리는 삶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갈등이 어디로부터 유래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맨얼굴을 드러내야 할 때 맨얼굴을 보여주려 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P38)

페르소나(persona)라는 말이 있다. 로마시절 연극무대에서 쓰던 가면이다. 나에게 부여된 역할인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와 맨얼굴을 균형 있게 신경 쓰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페르소나와 관계있는 육체, 소유물, 평판, 자유와 같은 일을 중시하는 반면 맨얼굴과 상관있는 믿음, 충동 욕구, 혐오 등 우리 자신이 행하는 일을 소홀히 하기 때문에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맨얼굴 관리가 중요하다. 이는 페르소나를 벗는 순간 망가진 맨얼굴을 보일까 두렵기 때문이다. 고위공직자들과 정치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아이와 같은 눈으로 살아라. 《이지,「분서」》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읽었으나,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공자를 존경하라 배웠으나 왜 공자를 존경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하다고 소리를 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으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속분서續焚書」「성교소인聖敎小引」(P43)

중국에서 공자의 위치를 생각해볼 때, 자신이 느끼는 데로 이렇게 솔직하게 말한다는 것이 놀랍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다고 해도 거기에 현혹되지않은 자유인의 솔직함과 당당함이 멋져 보인다. 맹목적으로 답습하기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명나라 유학자 이지(李贄)는 동심(童心), 아이의 마음을 강조했다.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았던 천상병시인이 생각난다.

모든 집착을 버리고 외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라.

《공(空)이란 무엇인가, 나가르주나「중혼」》

“어부의 주름에는 바다에서 파도와 싸우면서 생긴 인연이 새겨져 있고, 농부의 주름에는 땅과 싸우면서 생긴 인연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주름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이 고유한 향내를 풍기는 아름다운 꽃과 같다.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일인가? 인연이 다해서 사라진 젊음에 집착하느라, 인연의 새로운 마주침으로 생긴 근사한 주름을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이 들어 주름진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젊음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주름을 보면서 자신이 마주쳤던 수많은 인연들을 떠올리는 삶, 그것은 젊고 탱탱한 얼굴보다 더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P62)

나가르주나는 ‘내가 없다’고 주장한다.

아름다움도, 젊음도, 나의 아이도, 그리고 돈 마저도 모두 그러하다. 그것들은 모두 인연이 되어서 나에게 왔고, 인연이 다해서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이 공하기 때문에 우리는 부질없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은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싫어 거울을 잘 보지 않거나, 사진조차 찍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에게 하는 조언이다.

집착에 빠지면 타인에 대한 사랑도 관심도 없다. 《해탈의 지혜, 혜능「육조단경」》

“마음에 대한 것이든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든 집착은 우리로 하여금 타인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닦느라고 타인의 마음을 읽고 위로하지 못한다면, 불교가 강조했던 자비가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집착은 우리 자신을 고통에 빠트릴 뿐만 아니라, 고통에 빠진 타인에 무관심하도록 만든다. 특히 중요한 것은 후자의 측면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몰입하고 있을 때, 자신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누군가 방치된 채 시들어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무서운 일 아닌가?” (P68)

돈을 잃어버리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 우리는 거기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대학시절 사랑하는 애인이 떠나갔을 때 그 여자에 집착하여 괴로워했다던 친구가 법정스님이 <샘터>에 쓴 ‘포기의 미학’이란 글을 읽고나서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고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에피쿠로스,「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사실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즐겁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언젠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으로 아름다운 자태와 향내에 소홀한 꽃을 본 적이 있는가? 인간이 이름 모를 꽃보다 어리석어서는 안 될 일이다.”(P116)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ouros)는 이미 2000년 전에 죽음에 대한 부질없는 공포를 떨쳐내려고 했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하고 아무 상관이 없고, 죽고 나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죽음이 두려워서 벌벌 떨며 살지 말고, 그럴 힘이 있으면 현재 삶을 누리라고 충고한다. 옳은 말 같으나 죽음을 앞둔 병자에게 이 말이 위로가 될까?

예절이란 타인에 대한 배려이다. 《공자,「논어」》

“공자가 태묘에 들어갔을 때 일일이 물어보았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누가 저런 추인의 아들이 예를 안다고 했는가?

태묘에 들어가서 일일이 묻고 있다니!’

공자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예다.’”

「논어(論語),팔일(八佾)」(P141)

공자는 당시 예에 대하여 가장 정통한 사람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럼에도 모든 참배절차를 태묘의 관리인에게 일일이 물어 보았다. 공자는 태묘에 들어왔으면 태묘관리인에게 일일이 물어보는 것이 바로 예라는 것이다. 공자는 태묘관리인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했던 것이다. 타인에 대한 섬세한 배려가 없다면 예절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정호「程顥」,「이정집」》

“메를로 풍티(Maurice Merleau-Ponty)의 말은 우리 가슴을 아리게 한다. 우리는 순진무구함과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P171)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 한다. 그나마 우리는 폭력의 종류를 선택 할 수 있고 최소한의 폭력을 선택하여야 한다. ‘상처받을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측은지심을 가져야 한다. 결국 삶이란 고통이자 고통에 대한 감수성 이라는 것이다. 인간답다는 뜻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서 누구나 사랑할 수 있다. 《원효,「대승기신론별기」》

“특정한 사람만을 사랑하려고 고집한다면, 우리는 타자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을 유지할 수 없다. 손으로 연필을 잡고 놓지 않으려고 한다면, 컵, 책, 나아가 타인의 차가운 손도 잡아줄 수가 없다. 따뜻한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모든 사람들의 차가운 손을 어루만져주기 위해서, 우리는 매번 자신이 잡았던 손을 놓아주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싯다르타 자비의 정신 아닌가?”(P202)

원효(元曉)는 하나의 마음에 두 가지 양태가 있다 한다.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마음 진여(眞如)이고, 다른 하나는 요동치는 마음 생멸(生滅)이라한다. 요동치는 마음이 고요해져서 잔잔한 물처럼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된다고 한다. 이것은 해탈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요동치는 마음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내면 즉 기억의식 때문에 발생한다고 한다. 인간은 금지된 것과 결여된 것을 욕망하는 법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기억의식인 「알라야식」을 끊어내는 것이 해탈과 열반을 추구했던 불교인들의 핵심과제였다. 다만 이는 내부로부터 요동치는 마음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고, 외부로 인하여 요동치는 마음은 있는 그대로 섬세하게 반응하도록 둔다. 결국 불교가 내부로부터 요동치는 마음을 부정했던 이유는 타인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여가를 빼앗긴 불량한 삶에서 살고 있다. 《기 디보르,「스펙타클의 사회」》

“여가 시간은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이어서 자유로운 시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대중매체는 우리의 자유를 가만두지 않는다.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노동해서 만든 상품에 대한 소비 욕망을 증폭시키고 있다. 결국 여가 시간의 활동마저도 자본주의는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P251)

자본주의는 상품을 가진 사람보다 자본을 가진 사람에게 우월함을 보장하는 체제이다. 자본가는 다양한 유혹의 기술을 개발한다. 사람들은 어두운 밤의 집어등처럼 영화, 드라마, 축제, 대중음악, 광고 등 대중매체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 볼거리가 선정적이고 자극적 일수록 더하다. 기 드보르는 현대사회를 ‘스펙타클 사회’라고 규정한다. 우리는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이미지에 길들여지는 대신 온몸으로 겪어왔던 현실세계는 사라진다. 즉 드라마를 통하여 이미지화된 연애와 실제로 겪게 되는 연애의 차이가 사라진다. 이런 것은 권력의 입장에서는 좋다. 현실에 치열하게 참여하는 실천자는 줄어들고 거리를 두고 냉소적으로 구경하는 방관자는 늘어나기 때문이다. 정치드라마의 지나친 과장이 주는 폐해를 생각해 보아야한다.

사랑에도 지혜가 필요하다. 《사랑의 지혜, 장자「莊子」》

장자는 ‘바닷새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사랑의 지혜를 준다. 노나라 임금이 바닷새를 사랑한 나머지 종묘 안으로 데려와 술과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었으나 슬퍼 할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결국 사흘 만에 죽었다.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길렀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그가 누구이며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한다. 이를 위하여 장자는 허(虛)나 망(忘)이란 표현으로 답한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타인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을 비우거나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밖에 쟈크 라캉(Jacques Lacan)은 「에크리」에서 인간은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욕망에는 타인의 욕망이 깊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당신이 욕망 하는 것이 진실로 당신이 소망 하는 것인가 성찰해야 한다. 하지 말라고 부모가 말하면 아이들은 더하고 싶어 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임제(林悌)는 <임제어록>에서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미래에 대한 염려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처럼 현재 ‘지금 그리고 여기에’를 중요시 하는 것이다. 그는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라’외친다. 현재를 역동적으로 살 수 있는 자유에 장애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최시형(崔時亨)은 <해월신사법설>에서 스피노자(Spinoza, Baruch)처럼 인간자체가 신적인 생명력을 가진 존재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직면하는 난제를 초월자인 신에게 호소하지 말고 스스로 성찰하여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라는 뜻이다. 천도교의 ‘사람이 하늘이다’와 같은 뜻이다.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분명 생각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항상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은 오직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과 조우할 때에만 발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단히 자신을 가꾸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맹자(孟子)의 <맹자>에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진인사(盡人事)라는 말이 쉬운 말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자신을 닦아낸 뒤에야 맹자는 자신의 본성과 하늘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은 하늘의 명령이며 이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직 기도만으로 해결할 수 있 것처럼 말하는 현실종교에 맹신하는 오늘의 세계와 사뭇 다른 것이다.

칸트(Kant,Immanuel)는 <실천 이성 비판>에서 자유가 없었다면 책임도없었다고 말한다. 여기서의 자유는 ‘자신의 행동이 자율적이냐’의 문제이다. 자유라지만 인간을 목적 자체로 보기에 오늘날 가장 중요시 하는 보편적 인권보호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시간과 타자>에서 집단성을 ‘타자를 자신과 얼굴을 맞댄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시 독일 국민들이 자신들은 곧 작은 히틀러라고 생각한 것처럼, 단지 자신과 나란히 서있는 자로 인식 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전체주의의 발생 원인은 타자와 마주하면서 그에 반응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완전한 일치도 아니고 완벽한 분리도 아닌 관계, 이것이 레비나스가 생각했던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따라서 독재체제에서 애용하는 조화와 통일, 안정에 대한 욕망은 포기하여야 할 것이다.

정약용(丁若鏞)은 <맹자요의>에서 맹자나 주희와 달리 인의예지(仁義禮智)란 가치덕목은 우리에게 내재된 본성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을 통해서만확립되는 ‘무엇’이라고 했다. 이는 도덕적 감정만 가져서는 안 되고 타인에 대한 실천이 있어야 선하다는 것이다. 결국 다산은 결과를 중시하는 실학자이다.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지금 당신은 생각해야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 유대인 대학살을 주도한 아이히만은 근면 성실한 관료였다. 관료로써 최선을 다하여 명령에 따르다보니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죄는‘생각하지 않음’에 있다고 한다. 자신에게 부여된 명령이 유대인에게 어떤 영향이 있는지 생각하지 않은 것이 죄이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나? 어렵다.

한비자(韓非子)는 <한비자>에서 논리적으로 정당화된 생각만으로 상대방을 설득해서는 안 되고 상대방의 무의식적 정서, 자신만의 역린(逆鱗), 즉 상대방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상대방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읽을 수 있는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누구에게 충언할 때 우리가 조심하여야할 점이다.

베르그송(Bergson, Henri)은 <웃음>에서 웃음이 가진 혁명성을 말한다. 그는 우주의 모든 것이 창조적 진화라는 역동적인 과정에 있다고 보았다. 찰리 채플린이 웃음을 준 것은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계적이고 무반성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행동들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저항이라는 점이다. 〈개콘〉에서도 상식적인 인간행동이 아닐수록 웃음이 크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보았을 때, 전율을 느끼는 것은 ‘여기 그리고 지금’순간 아우라를 느낀 것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복제된 풍경사진과 미술작품 등으로 지금 우리는 아우라 상실 시대에 살고 있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의 자화상이다.

왕충(王充)은 <논형>에서 운명은 존재하는가를 말한다. ‘결론은 없다’이다. 인간의 삶은 우발성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하고서 조용히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다. 낚시질 한다고 항상 자신이 원하는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낚시 줄을 호수에 드리우지 않으면 아예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

노력하는 자에게만 행운이 있는 것이다.

노자(老子)는 도덕경에서 통치의 논리인 덕을 말한다. 덕(德)은 마음을 얻는 능력이다. 노자의 통치술에 의하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소중한 것을 먼저 주어야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빼앗으려하면 반듯이 먼저 주어야만 한다. 유비가 조자룡에게, 세종대왕이 사육신에게 실천했던 것도 덕의논리이다.

시몬 베유(Simone Weil)는 <중력과 은총>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한 신의 자식이다. 예수그리스도와 차이가 없는 존재이다. 베유는 불행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고 주인이 보낸 노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베유가 노동자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것도 가난한 이웃을 사랑 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하는 노예, 즉 진정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팽창위주의 교회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자크 랑시에르 (Jacques Ranciere)는 <정치에 관한 열가지 테제>에서 대의민주주의에서는 대표자가 선출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권리를 모두 양도한 무력한 존재로 전락한다. 대의민주주의는 대표자들이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집행하는 행정력으로 유지된다. 즉 정치는 치안 즉 폴리스의 힘으로 상징된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민주정치를 위해서는 부단히 직접 민주주의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서점에 가면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자기개발서이다.

아름다운 삶이 아니라 이기는 생존비법을 정의처럼 말한다. 우리는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알바 아니다. 오히려 무능한 존재로 보인다. 철학은 아픈 이에게 주는 일시적 진통제가 아니다. 아픈 상처부위에 메스를 대고 상처를 치료한다.

나는 그림자를 보고 짖는 개를 따라 같이 짖는 개처럼 그동안 투철한 자기의식 없이 살아 왔다. 그리고 호프집 한구석에서 한 잔의 술로 아픈 종기를 달래었다. 이제 나의 진정한 모습을 가지고 당당하고 두려움 없이 살고 싶다. 그런 면을 깨우쳐준 강신주의 책은 아주 유익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아토피를 이기는 면역밥상
우리 단체를 소개합니다
임영호의 조합장 일기
풍경소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