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가치의 전환
상태바
모든 가치의 전환
  • 임영호 칼럼
  • 승인 2016.09.08 14: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영호 인문학 노트] 책 속에서 길을 찾다
▲임영호 코레일 상임감사

니체의 철학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했다. 니체의 책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원서보다는 해설서를 구했다. 고병권의《니체의 위험한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선택했다. 1883년《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세상에 나왔을 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독자는 거의 없었다. 니체 본인이 ‘인류에게 보내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하였지만 출판업자들은 책 펴내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니체는 자비로 출판해야 했다. 그것도 단 40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자기철학을 이해하는 친구들을 기다렸다. “최소한 300년을 기다리지 못하면 내 책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무나 읽을 수 없는 책. 만인을 친구로 삼고 싶지만 아무나 친구로 삼지는 않는 책. 이 어려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오는 내용 중 나는 일부라도 이해하고 싶었다. 그것은 《신은 죽었다》라는 의미, 《위버멘쉬(Ubermensch,초인》, 《영원회귀》 세 가지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신의 죽음》에서 《영원회귀》를 발견했다. 그것을 통하여 《위버멘쉬 Ubermensch, 초인》라는 위대한 건강에 도달했다. 100년 전 니체는 낚시대를 드리우고 자기 말귀를 알아듣는 독자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나는 작은 물고기가 되어 체의 낚시에 걸리고 싶다. 니체는 성에 차지 않겠지만……

《짜라투스트라》는 소위 배화교(拜火敎)의 교주라 할 수 있는 조로아스터의 독일식 발음이다. 니체는 실존인물인 《짜라투스트라》의 이름과 생애, 지명 등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차용했을 뿐 배화교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선과 악, 현세와 내세 등이 원론적 세계관을 인류 최초로 설파한 인물이다. 니체의 세계관으로 비추어봐서는 경멸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과연 《신은 죽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의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우리는 삶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신을 만들었듯이 신을 죽인 것도 우리들이다. 니체가 말하는 신은 기독교의 신에 국한하지 않는다. 삶에 복종하기 보다는 삶에 군림하는 도덕, 종교, 철학, 과학, 국가, 돈까지 포함한다. 신의 죽음은 인간적 행태의 온갖 우상숭배의 종식을 말한다. 선악(善惡)이나 ‘아름답다 더럽다’를 판단케 하는 절대적 가치기준의 붕괴를 의미한다.

니체는 형이상학자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다른 어떤 세계, 바로 그들이 참된 세계라고 명명한 저편 세계의 관점에서 평가 절하하고 있다고 말한다. 신의 죽음으로 더 이상 그 영원한 진리나 초월적인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런 참된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한 셈이다. 문제는 신은 죽었지만 신앙이 남았다. 인간은 남아있는 신앙으로 계속 경배할 대상을 찾는다. 신의 죽음을 전하는 곳에서 《위버멘쉬》를 가르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위버멘쉬-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다.

니체의 말에 의하면 그동안 인간은 가치를 평가하지 못하는 한 무리의 가축 떼이며, 누군가 만들어 놓은 가치기준을 믿고 떠받들어온 신도들에 불과하다. 《짜라투스트라》에 의하면 이제 신은 죽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나? 인간이 스스로 극복하고 《위버멘쉬》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변신할 수 있었는가? 그동안 인간은 남들이 행복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자신들의 행복이라고 여기며, 남들이 가치 있다고 믿는 것도 자신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간적인 속성을 버렸기 때문이다. 즉 단절이다.

신으로 대표되는 도덕과 진리는 타인의 가치이다. 타인의 가치를 버리고 스스로의 가치를 확립할 수 있을 때 인간은 강한 자가 될 수 있고 《위버멘쉬》가 될 수 있다. 다시말해서 《위버멘쉬》라는 강자는 가치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고 그것에 따라 사물과 행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능동적인 사람이다. 정말로 문제되는 것은 ‘판단의 포기’이다. 판단하기를 포기하는 사람은 복종하는데 익숙해진다. 우상을 사랑하려거든 우상을 파괴하라고 한다. 그래서 《짜라투스트라》는 자기도 믿지 말라고 한다. 《짜라투스트라》를 의심하고 자기에게서 떠나라고 한다. 그는 신도가 아닌 친구를 원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인간의 세 가지 정신적인 변신을 말한다. 낙타, 사자, 아이 정신이다. 낙타는 모든 짊을 짊어지고 묵묵히 걷는다. 주인에게 한번도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자기 스스로가 「삶」을 견뎌야할 고통으로 만들어 놓고 ‘삶이란 고된 것이다’라는 말을 진리로 여긴다. 당신의 정신세계를 사막으로 만들어 놓고서…….

사자는 남의 말을 안 듣는 동물이다. 그는 어떤 주인도 섬기려 들지 않는다. 그는 사막을 자기의 왕국으로 만들 것이다. 자유의 쟁취, 가치를 창조하려면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자는 싫다고 반항하지만 그리고 나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짜라투스트라》는 정신은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는 언제나 해맑고 기발하며 한없이 자유롭다. 가치 창조가 가능한 존재다. 이 창조적 어린 아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이다. 《위버멘쉬》어린 아이는 자기욕망에 충실하다. 도덕이나 법률제도로 아이의 행동을 심판할 수 없다.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어린 아이가 우리 안에 있는 그 모든 것을 제압하여야 한다. 니체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 그 신성한 긍정을 배울 것을 강조했다. 전통적인 관점으로 말하자면 도덕적이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존재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인이다.

세상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들의 탁자이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실체적 사건 앞에서 다시 신을 믿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편안한 노예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이다. 여기서 《영원회귀, 永遠回歸》라는 사상을 제시한다. 이 사상을 통하여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을 갈망하는 인간의 모순적인 현실을 더 이상 신으로 해결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니체는 “우주에서 과거에 일어난 모든 사건과 지금 일어나는 모든 사건, 또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사건이 완벽하게 똑같은 사건들로서 똑같은 순서에 따라서 이미 일어났으며, 앞으로도 무한히 반복적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나타낸다. 그리고 묻는다.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

기독교의 시간관은 선형적이다. 과거는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의 내용을 가지고 심판을 받는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유럽의 전통인 그리스 게르만 세계에서는 농사절기와 같이 순환적으로 시간을 경험한다. 기독교에서는 살아있을 때 가난과 억압을 참으라고 하면서 영원불멸한 천국에서 모든 것을 보상받고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비하여 니체는 굴욕과 비겁으로 점철된 고통의 순간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주기로 영원히 반복되며, 다시한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온갖 고통과 억압을 극복하여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행복이란 고통을 피하는 방식으로 얻으려 했다. 하지만 니체는 고통조차 자기 변신의 자원으로 삼으라는 말이다.

「고병권」교수는 이 책을 내면서 주위에서 ‘겁나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만큼 정확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저자는 용기를 주문한다. 겁먹지 말고 《짜라투스트라》의 말을 들어보라는 것이다. 니체는 동료로써 독자를 구하기 위하여 낚시대를 드리우듯, 니체가 걸리면 좋고 안 걸려든다고 초조해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저 편안히 즐기시라’한다. 아무런 입질이 없다면 그냥 자리를 뜨면 된다고 말한다.

니체와 관계를 맺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한다. 문제는 그 소리가 우리 시대의 노래라는 것이다. 정작 두려워할 것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소음과 습속들에 너무나 중독되어 있다. 우리는 니체의 말귀를 알아듣기 위한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의 생각을 뒤집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모든 가치의 전환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도 다시 보이게 될 것이다. 모든 사상가는 자기 시대의 아들이라 한다. 하지만 니체는 예외이다. 그는 시대를 뛰어넘는 사상가이다. 그의 철학은 지금-여기의 삶을 위한 것이다.니코스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주인공 조르바처럼.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아토피를 이기는 면역밥상
우리 단체를 소개합니다
임영호의 조합장 일기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