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가을매의 기상처럼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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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가을매의 기상처럼 살아라
  • 임영호 칼럼
  • 승인 2016.10.27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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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 인문학 노트] 책 속에서 길을 찾다

궁한 살림 올 이 없어

늘 상 옷을 벗고 사네

부서진 집 바퀴 벌레

밭두둑엔 팥꽃남아

병이 많아 잠은 줄고

책 쓰느라 근심 잊네

오랜 비 괴롭잖네

 

장마 때였나 다산 정약용 (丁若鏞)은 연일 주룩주룩 내리는 비 속 에서 유배지에 홀로 떨어져 있는 자기 처지를 시로 표현한다. 세상에서 잊혀진 그를 누가 찾아 줄 리 없고 그렇고 보니 자연히 의관을 차려 입을 필요가 없다. 비새는 천장에서 떨어진 것은 바퀴벌레이고 그래도 고맙게 팥꽃이 피어 있다. 몸은 병들어 가고 이런저런 근심을 잊으려고 책 짓는데 몰두한다.

1801년 2월 28일. 다산은 멀리 전라도 강진으로 세 번째 귀양길에 오른다. 22세에 초시에 합격한 후 40세 때까지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아 태평성대의 큰 꿈을 함께 이루려 했던 그는 서학으로 인해 가문은 폐족 되고 개혁추진 세력인 시파는 전멸되다 시피한 처지에서 이제 기약 없는 유배가 시작이 된 것이다.

한국 천주교사의 주요인물들이 그의 친형제요, 조카요 그의 친인척이니 목숨만이라도 건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유배지 강진으로 떠날 때 첫아들 학연(學淵)이 열여덟 살, 둘째아들 학유(學游)가 열다섯 살 이었다. 그들 인생에 가장 중요한 시기였기에 아버지 다산은 근심과 걱정, 기대와 희망이 컸다. 아버지로서의 잔잔한 부정(父情)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 녹아있다. 또한 자기보다 더 먼 유배지 흑산도에 있으면서 지식을 서로 나누며 존경하고 의지했던 둘째형 약전(若銓)과 저술 활동을 함께 하였던 아끼는 제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이들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으로 실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학자 다산의 인생철학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다산은 여느 아버지와 같았다. 몰락해가는 집안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자식 때문에 조바심을 내는 아버지였다. 다산은 편지에서 구구절절 아들이 학문에 매진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그는 학문의 근본은 효라고 본다.

“우리는 폐족이다. 폐족이 글을 읽지 않고 몸을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면 어찌 사람구실을 할 수 있느냐 ?”

“폐족이라 벼슬은 못하지만 성인이야 못 되겠냐 ? 문장가가 못되겠냐?”

“폐족으로 잘 처신하는 것은 독서밖에 없다”

“폐족이라 과거 공부안하고 학문다운 학문할 수 있는 기회이다”

“먼저 반드시 효제(孝弟)를 힘써 실천함으로써 근본을 확립해야 하고, 근본이 확립되고 나면 학문은 자연스럽게 몸에 베어들고 넉넉해진다.”

사람은 인간성에 바탕을 둘 때 비로소 목표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이 일을 하면 부모님이 기뻐하시겠지 하는 마음이 마음속에서 우러날 때 갈 길의 방향이 정해진다. 이 동생이 저렇게 잘하니 나도 잘해야지 하는 생각을 지닐 때 오로지 정진할 수 있다.

“반드시 처음에는 경학(經學)공부를 하여 밑바탕을 다진 후에 옛날의 역사책을 섭렵하여 옛 정치의 득실과 잘 다스려진 이유와 어지러웠던 이유 등의 근원을 캐볼 뿐 아니라 또 모름지기 실용의 학문, 실학(實學)에 마음을 두고 옛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했던 글들을 즐겨 읽도록 해야 한다.”

경전 공부로 바탕을 만들고, 그 바탕위에서 원리를 적용하고, 변화를 이해 시켜 준다는 것이다. 경전공부를 우선적으로 하라는 것이다. 경전 공부는 수기(修己) 즉, 자기 몸을 닦는 학문이며, 이를 바탕으로 치인(治人) 또는 안인(安人)에 해당하는 역사와 경제 국방에 관한 것들로 외연 확장한다.

책한권에 끝장을 보아라

다산은 두 아들들에게 독서하는 방법도 가르친다. 무릇 남자가 독서할 때 태산도 옮길 수 있다는 정신력으로 전념하여야 하고, 그냥 마구잡이로 읽어 내리기만 하면 하루에 백번 천 번을 읽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의미를 모르는 글자를 만나면 그냥 넘어 가지 말고 완전히 알 때 까지 끝장을 보라고 권한다.

“예컨대 자객전(刺客傳)을 읽을 때 기조취도(旣祖就道)라는 구절을 만나 “조(祖) 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으면. 선생은 “이별할 때 지내는 제사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제사에 꼭 조라는 글자를 쓰는 뜻은 무엇입니까?” 라고 다시 묻고, 선생이“잘 모르겠다” 라고 대답하면 집에 돌아와 자서(字書)에서 조(祖)라는 글자의 본뜻을 찾아보고 자서에 있는 것을 근거로 하여 다른 책을 들추어 그 글자를 어떻게 해석했는가를 고찰해보고 그 근본이 된 뜻만 아니라 지엽적인 뜻도 뽑는다.”

책의 목표를 세우고 정리를 하라

다산은 두 아들에게 새로운 책을 쓰는 방법을 가르친다.

먼저 관련 책을 읽는 자의 주견(主見)이 확립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무엇 때문에 이 책을 읽는가, 이 책 가운데 어떤 정보가 필요한가를 명확히 한 다음 취사선택이 되고 베겨쓰기 초서(鈔書)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목표와 목차 개요를 세우는 일이다. 다산은 편지에서 학습할 요량으로 거가사본 (居家四本)이라 칭하며 예를 든다. 가정에서의 올바른 행위에 관한 것인 이 책을 쓰기 위하여 분야별 목차, 다룰 범위와 내용, 이에 관련된 자료목록을 세우고 시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실제「주서여패(朱書余佩)」라는 책의 편집을 명한다. 12개의 목차, 목차 당 12개의 항목, 항목당 내지는 6~7줄로 예시한다. 책 내용을 뽑을 때도 평범한 것은 하지 말고 따끔하게 자극을 줄 만한 것만 뽑으라 한다.

다산의 수많은 책의 저술 방법도 이렇게 진행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어떤 책을 쓸까 하는 책의 목표를 세우면 분야별 목차를 정하고 참고문헌들로 부터 관련 내용을 옮겨 적는 소위 초서(鈔書)라는 카드 작업을 하고 이를 편집하여 초고를 만들고 그런 다음 토론을 거쳐 초본을 만들며 또 토론을 통하여 그 초본을 수없이 고쳐 최종적으로 정본 즉 한권의 책이 완성된다. 다산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지도교수이고 아들과 제자들은 석박사 연구생이며 형 약전은 다산과 토론 하는 관련분야 교수이다. 다산은 무슨 일이든지 소위 지식인답게 이렇게 정리하고 집대성하는 모범을 보인다.

한 예로 아들이 닭을 키운다는 말을 듣자 칭찬하면서 사대부의 양계법은 일반사람과 다르다며 소위「계경(鷄耕)」이라는 책을 엮어 보라고 말한다. 닭을 길러 달걀을 얻고 병아리를 기르는 일은 속된 일이지만 이 속된 일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아하고 깨끗한 일이 된다고 조언한다.

폐족일지라도 선비정신이 살아있어라

다산이 가장 노심초사하는 것은 자식이다. 편지 속에서 두 아들을 직접 곁에 두고 가르칠 수도 없고 마음대로 안 되는 것 같아 안절부절한다. 역정을 내고 칭찬하며 때로는 윽박지르고 타이르며 편지 속에서 아주 세심한 부분까지 지적한다. 다산이 두 아들에게 가장 많이 말한 효도란 무엇인가? 이른 새벽에 문안드리고 저녁에 주무실 때 이부자리를 보살피는 것과 같은 작은 일에 세심한 배려를 하는 정성이다.

“너희 형제는 새벽이나 늦은 밤에 방이 찬가 따뜻한가 항상 점검하고 요 밑에 손을 넣어보고 차면 항상 따뜻하게 몸소 불을 때드리되 이런 일은 종들을 시키지 않도록 해라.”

다산은 아들의 주량까지도 걱정한다. 첫째 아들 학연이 강진에 왔을 때 은근이 술을 마시게 하고 주량을 엿본다. 만만치 않은 주량을 보고 속으로 놀라서 동생 학유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묻는다. 자기보다 배 이상 잘 마신다고 하자 다산은 곧바로 둘째에게 술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편지를 쓴다. “폐족에다가 술주정뱅이라는 이름을 더 가진다면 앞으로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인가?”아버지는 호소에 가깝도록 타이른다. 틀림없는 우리네 아버지와 같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오직 두 글자를 부적처럼 지니고 살라한다.

“한 글자는 근(勤)이고 다른 한 글자는 검(儉)이다.”

그가 자식에게 권하는 일상 생활은 이렇다.

“효제(孝弟)를 숭상하고 화목하는 일에 습관 들게 하며 경사(經史)를 연구하고 시례(詩禮)를 담론하면서 3,4천 권의 책을 서가에 진열하고 일 년 정도 먹을 양식 걱정 안 해도 되고, 원포(園圃), 상마(桑麻), 소과(蔬果), 화훼 약초들을 심어 잘 어울리게 하여 그것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구경하면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 마루에 오르고 방에 들면 거문고 하나 놓여 있고, 주안상이 차려 있으며, 투호(投壺) 하나, 붓과 벼루, 책상, 도서들이 품위 있고 깨끗하여 흡족할 만한 때에 마침 반가운 손님이 찾아와 닭 한 마리에 생선회 안주삼아 탁주 한잔에 맛있는 풋나물로 즐겁게 먹으면서 어울려 고금의 일을 논의하면서 흥겹게 산다면 비록 폐족이라 하더라도 안목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 할 거다.”

다산의 유배가 한참이 되여 조정에서도 공격이 무디게 되었을 때 유배에 앞장선 홍의호, 강준흠, 이기경에게 다산이 해배를 간청 하는 것이 어떠냐는 큰 아들의 편지에 그가 생각하는 삶의 기준을 말한다.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는데 옳고 그름의 기준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에 관한 기준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서 네 단계의 큰 등급이 나온다. 옳음을 고수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단계이고, 둘째는 옳음을 고수하고 해를 입는 경우이다. 세 번째는 그름을 추종하고도 이익을 얻음이요. 마지막 가장 낮은 단계는 그름을 추종하고 해를 보는 경우이다. 따라서 그것은 세 번째 등급을 택하는 일이다. 그러나 마침내는 네 번째 등급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 명약관화하다.”

다산은 날카로운 칼로 내려치듯이 아들제의를 거절한다. 이는 어려울 때 임금을 배반하고 적군에 투항하는 사람과 같다고 빗대어 아들의 등골이 오싹 했을 것이다. 추상같은 선비정신이다.

다산은 정조와의 군신관계에서 벼슬살이에 대한 자기생각을 털어놓는다. 임금이 나를 알아주었지만 후회되는 일도 많다한다. 두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나치게 거리없이 지냈던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하다.

총애나 영광보다 더한 것 있다.

“임금을 섬기는 방법에는 임금의 존경을 받아야지 임금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지 않다. 임금의 신뢰를 받아야지 임금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지 않다.”

1818년 5월,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세월을 기다렸던 다산은 18년 만에 드디어 해배된다. 마흔 살에 강진에 유배당했던 그는 쉰여덟이 되어 마재 본가를 밟는다. 그동안 막내아들도 잃고 형 약전의 죽음도 있었으며 본인은 심신에 병이 깊어 말이 아니었지만「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등 우리역사상 빛나는 책을 무려 260권을 완성하였다.

다산의 강진 제자 황상(黃裳)의 글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 선생님께서는 귀양살이 20년 동안 날마다 저술만 일삼아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났습니다.”

다산의 크나큰 성과 뒤에는 과골삼천(踝骨三穿)이란 노력다운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다산이 편지 속에서 그토록 후세들이 읽어주고 책 한부분이라도 베껴두기를 바랬던 책들은 그의 바램대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오늘날까지 최고의 책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 다산은 정말 인생을 잘 살 줄 아는 사람이다. 자기 인생에서 비참할 정도로 아픔이나 좌절이 있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인생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향해 열정을 바치며 최선을 다한 사람이다. 다산은 두 아들들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한때의 재해를 당했다하여 청운(靑雲)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의 가슴속에서도 항상 가을매가 하늘로 치솟아 오를 기상을 품고서 천지를 조그마하게 보고 우주도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옳다.”

다산이 다시 살아나서 나에게 한 말씀 거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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