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인간적인 사람, 반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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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인간적인 사람, 반고흐
  • 임영호 칼럼
  • 승인 2016.11.11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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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 인문학 노트] 책 속에서 길을 찾다
▲임영호 코레일 상임감사

그림에 관심 없는 사람도 이 사람만은 알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이 세상에 존재했던 화가들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 숱한 이야기 거리로 지금 이 순간에 세상 어느 곳에서도 고흐에 관한 기사나 방송, 전시회가 열리고 있을게다.

어느 휴일 날 영화시작이 아직 멀었기에 아래층 서점에 들렀다가 이 도발적인 책제목에 끌렸다. 박우찬의 <고흐와 돈, 그리고 비즈니스>. 생전에 단 한 점만이 팔렸고, 어느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았으며, 극히 가난했던 그였기에 돈과 비즈니스는 좀 엉뚱했다.

고흐는 자기 신세를 한마디로 끔찍한 ‘새장에 갇힌 새’와 같다고 말한다. 더구나 관심도 끌지 못하는 그의 그림, 그로인한 궁핍함, 동생에게 신세짐에 대한 미안함,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상처와 그로 인한 발작증세의 반복으로 피폐해진 삶, 정말 그에게 한 가닥 희망과 꿈꾸는 영혼은 사치에 불과했다. 그는 상처받은 영혼으로 그림을 그렸다.

“해방은 뒤늦게야 오는 법이다. 그동안 당연하게든 부당하게든 손상된 명성, 가난, 불우한 환경, 역경 등이 그를 죄수로 만든다. 그를 막고, 감금하고, 매장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지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떻게 표현하기 어려운 창살, 울타리, 벽 등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환상이고 상상에 불과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묻곤 한다. 신이여, 이 상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요? 언제까지 이래야 합니까? 영원히?” (반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P25)

고흐의 첫 인생 목표는 성공한 샐러리맨이 되는 것이었다. 1869년 16세의 고흐는 흥미를 잃은 학교를 그만두고 삼촌의 소개로 헤이그의 구필화랑(Goupil & Cie)에 취직한다. 고흐는 화랑 일에 아주 만족하고 틈나면 미술관에 들려 그림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 그 곳을 떠난다. 사람을 현혹시켜 그림을 파는 장사에 대한 환멸과 영국 근무 중에 있었던 첫사랑의 실패에서 받은 상처 때문이다.

고흐는 아버지의 후원으로 목사가 되고 싶었으나 이것도 잠시, 골치 아픈 공부에 참을 수 없었던지 신학대학을 포기하고 벨기에 남부 어느 탄광촌에서 임시직 전도사 자리를 얻는다. 거기서도 고흐는 강론을 잘 하지 못하는데다가 성직자로서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노동자같이 처신한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어느 날 고흐는 네덜란드의 바로크 화가인 렘브란트 (Rembrandt 1606~1669) 그림을 보면서 화가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느끼며 1880년 10월, 27살 늦은 나이에 전업화가의 길에 들어선다. 그는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아버지는 이미 고흐를 포기한지 오래였다. 4살 아래 남동생 테오 덕분에 화가의 길로 들어섰으며 형이 죽는 날까지 뒷바라지를 하였다. 그는 고흐와 형제관계를 넘어 평생의 친구였고 후원자였다. 고흐 동생에게 쓴 편지 속에는 항상 이 말로 시작된다.

“보내준 100프랑 고맙다” “친절한 편지와 100프랑 고맙다”

상처받은 영혼으로 그리다

고흐는 조선의 김홍도처럼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고뇌를 그리고 싶어 했다. 착하고 수수한 사람들이 좋고 늙고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에 더 마음이 갔다. 그는 말했다. “나에게는 폭풍우의 드라마, 슬픈 인생의 드라마가 감명적이다.” 언젠가 고흐는 프랑스남부 아를Arles에서 “겨울철이 되면 나는 겨울 밀처럼 추위에 떨지요.” 라는 어느 토목공의 말을 듣고 감동한 적이 있었다. 고흐는 모델을 신중히 선택했다. 인물화를 그릴 때 그러했다. 고흐는 아무리 친해도 얼굴에 인생의 역정이 녹아있지 않는 인물들은 그리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시간과 계절감각을 가지고 있지만 부자들은 그렇지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그리지 않았다.

평생 자기 혼자 불꽃을 태웠다가 제풀에 꺼져버리는 사랑만 한 그에게 유일하게 짧은 기간 동거하면서 모델로 한 창녀 시엔의 그림 「슬픔」, 사회에서 버림받은 낙오자들이 복권가게에서 일확천금을 노리며 서 있는 모습 「복권가게」, 양로원과 고아원에서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들 「커피를 마시는 고아노인」, 「식사 전의 기도」, 서민들의 순박한 삶과 그들의 힘든 노동을 그린 작품 「직조공」, 「방직기를 돌리는 여인」, 「초가집과 농부의 귀가」, 「감자 먹는 사람들」이 있다.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이 화가는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어쩌면 내 그림의 거친 특성 때문에 더 절실하게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런 경지에 이르고 싶다. 그것이 나의 야망이다.”(반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P64)

대지와 예술가는 사후에 칭송받는다

고흐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고흐가 평생 36점의 유화로 자화상을 그린 것은 정물화가 그랬듯이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모델료가 없어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일이다. 또 한 가지 사람의 마음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두 눈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그렸다. 그리고 그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순간에만 그렸다. 고흐의 자화상은 고흐가 변하여 가는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파리 시절 사랑에 빠졌을 때 남자의 자존심을 보았으며 죽기 바로 전에 살았던 상레미(St. Remy)시절의 자화상에는 거의 미친 듯한 표정과 일그러진 흉악한 모습으로 천 길 낭떠러지에 서있는 것 같았다.

고흐의 그림에 나오는 화방주인이 있다. <탕기영감>이다. 마음씨 착한 인정 많은 사람으로 고흐의 그림을 인정해준 사람이다. 고흐의 궁핍함을 배려하여 물감이나 그림 그리는 도구를 자기마누라 몰래 외상으로 주었던 사람이다. 고흐는 생전에 이 탕기영감을 통하여 일본의 채색 목판화를 수집했고 또 흠뻑 빠져 열심히 따라 그렸다. 심지어 모르는 한자까지도 정성껏 본땄다. 단순한 선과 강력한 색 면의 일본 목판화는 고흐의 그림에 절대적 영향을 주었다. 당시에 지금의 싸이나 한류처럼 일본문화가 유럽사회에 크게 유행하였다. 실은 프랑스 인상파 모네(Monet) 마네(Manet) 모두가 일본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고흐는 이 때 모은 판화로 평소 잘 가는 카페에서 일본목판화전을 개최한다. 고흐 평생에 한두번 있었던 전시회중 하나이다.

현재 네덜란드의 반 고흐 미술관에는 고흐와 테오가 수집한 5백여 점의 일본 목판화가 소장되어 있다. 정작 일본에는 당시의 목판화가 없다. 고흐의 후기 인상파 그림에 커다란 기여를 한 히로시게의 <빗속의 다리>는 1997년 10월 런던 소더비(Sothby’s)에서 약1억에 경매되었다. 고흐가 사후에 네덜란드에 기여한 부는 어마어마하다.

고흐와 고갱의 만남, 귀를 자르다

고흐의 귀를 자른 사건은 고흐를 아는 사람은 거의 다 아는 일이다. 사실 당시 자기보다 잘 나가는 폴 고갱 (Paul Gauguin)을 초대한 것은 비즈니스 차원이다. 1888년 프랑스 남부 아를에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어 자기에게 지금까지 후원한 동생의 투자비를 되찾게 해주고 싶었다.

고흐는 고갱이 좋아하는 노란 해바라기 그림을 그려 고갱이 거처 하는 방을 꾸미고 서로의 자화상을 그려 교환하는 등 진심을 보여 가까스로 고갱이 고흐의 아를 노란 집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2개월도 채 못가 고흐가 귀를 자르는 사건으로 깨진다. 그 후 고흐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때때로 정신분열증이 반복적으로 발생하여 가누기도 어려웠으나 그 병원에서 수많은 걸작을 만들어낸다. 그중 병원 정원에 핀 꽃을 그린 작품<붓꽃>은 1987년 뉴욕 소더비에서 539억에 경매 되었다.

1890년 5월 병원 생활에 지친 고흐는 요양을 위하여 정신과의사 가셰박사가 있는 프랑스 북부 시골마을 오베르 쉬르 우와르Auvers Sur Oise에서 마지막 생을 보내면서 내내 붉게 탄 밀밭이 있는 들판에 나가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동생의 결혼과 조카 빈센트의 태어남으로 지원이 끊길 것이라는 불안감, 치유가능성이 없는 정신분열증으로 인한 절망감으로 들판에서 새 쫓는데 쓰는 권총으로 아랫배를 쏜다. 1890년 7월 29일 37세의 나이다.

“아무래도 난, 실패한 것 같다. 그것은 내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테오야 미안하다…” “테오야…, 이제 이대로 내버려 두려무나. 내 가슴의 고동을 들으며 그냥 가고 싶어.”

이 책을 다 읽고 책을 덮으면서 한참을 생각했다.

누가 말 했나 ‘돼지와 예술가는 사후에 칭송받는다.’고

존재와 시간이 일치하지 않은 것이 이 한 사람뿐이겠는가? 삶과 예술은 분리할 수도 분리될 수도 없다. 그렇기에 반 고흐의 예술은 인간의 소리이다. 예술은 영혼을 먹고 자란다고 한다. 상처받은 한 인간의 영혼의 소리이다. 나는 언젠가 파리에서 밤기차를 타고 아를로 가 고흐가 밤 2시까지 마신 지루부인의 카페에서 독한 압센트 한잔 시켜놓고 고흐의 영혼을 달래주고 싶다.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 반 고흐,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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