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승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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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승의 죽음
  • 탄탄스님
  • 승인 2019.05.23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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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스님(자장암 감원, 동국대 출강)
탄탄스님(자장암 감원, 동국대 출강)

일본의 에도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를 살다간 임제종의 사사 호쿠인(樂樂北隱) 라는 선승이 있었다. 여름에는 삼베 홑옷 한 벌, 겨울에는 솜옷 한 벌로 지내며 청빈하게 살았다.

오래도록 눕지 않고 앉아 수행에 전념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였는데, 어느 날 호쿠인 선사는 시자를 불러 말하길 “오랫동안 그대에게 폐를 끼쳤다. 금년 추석에는 그만 쉴란다”라고 했다.

시자가 묻기를 “스님, 이제 그만 이 세상을 뜨시겠다는 말씀이신지요?”

“그러네.”

“정 그러시다면 다른 때를 택하시지요. 추석에는 바쁜 때라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치게 됩니다.”

“그런가, 그럼 오늘은 어떤가?”

“오늘은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내일로 하자.”

이러한 대화가 오고 갔지만 시자는 스승의 진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날로 호쿠인은 알림장을 널리 친지들에게 보내었다.

“내일 세상을 뜨려하니 한번 뵙기를 청하오.”

다음날 사람들이 웬 일인가하여 모여들고 선사는 목면 백의에 마로 지은 수의를 입고 있었으며 이른 아침부터 목욕재계를 하고는 고요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정오가 되자 이때 호쿠인은 입을 열며 “여러분에게 들려 줄 이야기가 있다”고 하더니 입적하는 것이었다.

아무 말 없이 그렇게 호쿠인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를테면 좌탈(坐脫, 좌선한 채로 죽음)이었다..

또 간잔에겐(關山慧玄)이라는 선승이 있었는데, 갑자기 여장을 꾸리더니 제자를 불러 말했다.

“너에게만 작별인사를 할 터이니 다른 이들 모르게 가서 삿갓을 좀 가져다 다오.”

제자가 삿갓을 가져오자 잔잔은 그를 데리고 절을 떠났다. 한참을 걷다가 커다란 소나무 아래서 잔잔은 제자에게 말하길 “나는 이제 갈련다. 뒷일을 잘 부탁한다.”

이 말을 마치고 잔잔은 그대로 숨을 거두어 버렸다. 짚신을 신고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선 채로 잔잔 선사는 임종을 한 것이다. 세수 84세 입망(立亡, 선 자세로 열반하는 것)한 것이다.

선승이 앉아서, 또는 서서 맞이하는 최후인 좌탈입망(坐脫立亡)이 흔한 일은 아니나 죽음을 초월하여 삶과 죽음으로부터 자유자재함을 엿볼 수 있다.

불가에서는 스님네들이 죽음에 이르면 마지막 말을 한 편의 시로 남기는 전통이 있다. 이를 임종게(臨終偈)라고 한다.

타쿠앙 선사는 죽을 때가 되었지만 임종게를 남기려하지 않았다. 이런 스승의 태도에 제자들은 재촉을 하였지만 다쿠앙은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 이에 제자들도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인 임종게를 쉽게 포기하지 않고 거듭 간청했다.

결국 다쿠앙은 붓을 들어 글자를 쓰니 꿈 몽(夢) 한 자였다. 인생이 한바탕의 꿈이라는 뜻일까? 임종게 뿐 아니라 다쿠앙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선승다웠다.

“장례 따위를 치르지 마라. 내가 죽으면 내 주검을 남모르게 옮겨 들에 묻어라. 그리고 잊어라. 당연히 부도니 탑이니 만들지 마라. 땅에 묻은 뒤에는 두 번 다시 찾아오려 하지 마라. 그 어디서고 부조금도 받아서는 아니 되며 위패 또한 필요 없다. 49재 등 일체의 의식을 원치 않는다. 나라에서 무엇이 오더라도 절대 받지 말라.”

어느 스님은 이런 글을 남기기도 한다.

염주끈이 풀렸다
나 다녀간다 해라
먹던 차는
다 식었을 게다
새로 끓이고
바람 부는 날 하루
그 결에 다녀가마
몸조심들하고
기다릴 것은 없다

여기에서 ‘염주끈이 풀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몸이란 ‘음과 양’, ‘오온’, 그리고 ‘빛과 에너지와 어둠’ 이라는 세 가지 속성의 우연한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이 결합체가 해체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염주끈이 풀려 염주알들이 땅바닥에 이러 저리 흩어진 것으로 죽음을 은유할 수 있는 것이다.

‘나 다녀간다 해라’는 구절은 ‘삶’이라는 소풍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다는 천상병의 시 ‘귀천(歸天)’을 연상하게 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천상병의 시 귀천 중에서-

의식이 몸을 떠나면 몸 역시 식어갔을 것이고 그가 먹던 차 역시 식어갔을 것이다. 나의 죽음을 만나거든 개의치 말고 차나 새로 끓이라고 당부하는 것은 그이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훌쩍 떠나 있음을 나타낸다.

몸이 사라지면서 그는 존재 자체가 된 것이다. 우주가 된 것이다. 별이 되고,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람 부는 하루 그 결에 다녀가마’라고 말하고 있는 배경이다. ‘존재’로서 늘 함께 있고, ‘공’으로 모두가 하나이니 ‘기다릴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몸조심들 하고’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떠나 헤어지게 되었지만 서로의 인연을 되새김질하는 인간으로서의 감성을 드러냄으로서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세계는 어떻게 생기게 된 것일까? 나는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을까? 죽음이란 무엇일까? 평생을 관통하는 화두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스티븐 호킹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주(내가)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인간 이성의 최종적인 승리가 될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신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보이는 것만을 대상으로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과 죽은 후의 세계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과학으로는 답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한다. 꿈에서 깨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우주(내)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붓다께서는 이렇게 답했다.

“모든 존재는 스스로 생(生)할 수 없고 홀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그 안에 주체나 실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다만 인연 따라 나타났다가 인연 따라 사라진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몸과 마음이 실체가 아니고 우연한 사건이나 현상이라는 것이다. 내가 나라고 믿고 있는 나는 ‘관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태어나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아니라는 깨우침이다.

그 어떤 존재도 홀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모든 존재란 본시 공(空) 이라는 통찰은 붓다의 깨우침과 일치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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