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충남역사] 3. 계백장군 오천결사대와 백제 부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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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충남역사] 3. 계백장군 오천결사대와 백제 부흥군
  • 이호영 기자
  • 승인 2019.10.1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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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은 산·강·평야가 조화롭게 발달하고, 서해의 풍부한 물산과 편리한 교통으로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불렸습니다. 또한 한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충남의 인물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온몸으로 일어서는 충절의 정신을 보여줬습니다. 이에 밥상뉴스는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과 함께 역사 속 인물들을 중심으로 충남이 지닌 유구한 역사를 되짚어보고, 이를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과 주민들에게 자긍심과 지역사랑을 심어줄 수 있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백제와 나당연합군의 전투 개요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에 맞서기 위해 5세기부터 나제동맹을 맺고 정치적·군사적으로 협력했다. 7세기 전반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이끄는 나제동맹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도 했다. 이때 백제는 한강 하류 일대를, 신라는 한강 상류 일대를 차지했다.

하지만 점차 힘을 키운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까지 차지하면서 두 나라의 오랜 동맹이 깨졌다. 배신한 신라에 분노한 성왕은 신라를 공격했으나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이 전투에서 성왕도 전사하였다. 성왕이 죽은 뒤 백제와 신라는 사이가 점점 나빠졌다. 특히 백제의 의자왕은 여러 차례 신라를 공격하여 많은 성을 빼앗으며 신라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와 나당연합을 맺고 백제를 공격한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 장군의 13만 대군과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 대군이 동시에 백제를 공격했다. 당나라 군대가 금강어귀에 도착하고, 신라군도 탄현을 넘어 도읍인 사비성으로 다가왔다.

다급해진 의자왕은 가장 신임하는 계백장군에게 결사대 5000명을 이끌고 황산벌(충남 논산시 연산면)에서 신라군을 막도록 했다. 계백 장군의 5000 결사대는 신라의 5만 대군을 상대로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이겼다. 하지만 10배나 많은 신라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패하고 말았다.

계백장군 동상
계백장군 동상

황산벌에서 승리한 신라군은 당나라군과 만나 백제 도읍인 사비성을 무너뜨렸고, 의자왕이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했다.

멸망한 나라의 마지막 왕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다. 그 중에도 백제의 의자왕은 사치와 향락의 상징이 되었다. 사비성이 무너지자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자왕이 3000명이나 되는 궁녀를 거느리고 살았다는 이야기는 어느 역사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사비성 인구가 5만 명 정도였음을 생각하면 궁녀가 3000명이나 되었다는 건 믿기 어렵다.

삼천궁녀 이야기는 조선시대 문인들이 지은 시에서 처음 나온다. ‘삼천 궁녀들이 모래에 몸을 맡기니’, ‘구름 같은 삼천궁녀 바라보고’라는 표현이 있다. 옛날에 ‘삼천’이라는 말은 실제 숫자라기보다 ‘많다’는 뜻으로 자주 쓰였다.

낙화함 백화정
낙화암 백화정

의자왕의 삼천궁녀도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백제가 멸망할 때 생긴 슬픈 사연을 조선시대 문인들이 시로 쓰면서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의자왕은 중국의 증자처럼 어려서부터 효심과 우애가 깊고 학문이 뛰어나서 ‘해동 증자’라 불렸다.

한편, 나당연합을 맺은 신라와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정복한 땅을 나눠 갖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당나라는 백제 땅을 독차지하기 위해 백제 땅에 당나라 관청인 도독부 5개를 세우려고 했다. 이런 당나라의 속셈을 막은 것은 백제 유민들이다. 살아남은 백제의 왕족과 귀족, 백성은 백제 부흥군을 만들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웠다.

흑치상지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임존성(충남 예산)에서 당나라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기고, 왕족 복신과 승려 도침도 주류성(충남 서천)에서 군대를 모아 부흥군의 힘은 날로 커졌다. 백제 부흥군은 바다 건너 왜(일본)로 피신한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새로운 왕으로 모시고, 백제를 다시 세우려고 했다.

충남 예산 임존성
충남 예산 임존성

당시 왜도 백제가 멸망한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무엇보다 당나라 군대가 일본에 쳐들어올까봐 두려워했다. 마침 백제 부흥군의 지도자인 복신 장군이 일본에 피신한 부여풍 왕자와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자, 일본은 서너 차례에 걸쳐 3만 명이 넘는 지원군과 물자를 보낸다. 하지만 백제와 일본 연합군은 금강 하류인 백강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크게 패한다.

결국 당나라와 신라의 공격으로 주류성이 무너지고, 마지막까지 임존성에서 싸우던 흑치상지 장군이 항복하면서 백제를 다시 세우기 위한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의 저항에 부딪힌 당나라는 본래 세우려던 5개 도독부 가운데 웅진도독부만 세워야 했다.

당나라가 백제 부흥군과 싸우는 사이에 신라는 당나라가 점령한 백제 땅을 대부분 차지할 수 있었다. 마침내 신라는 백제가 멸망한 지 12년이 지난 672년에 웅진도독부를 몰아냈다.  <도움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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