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충남역사] 5.백제유민과 후백제를 세운 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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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충남역사] 5.백제유민과 후백제를 세운 견훤
  • 이호영 기자
  • 승인 2019.10.17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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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은 산·강·평야가 조화롭게 발달하고, 서해의 풍부한 물산과 편리한 교통으로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불렸습니다. 또한 한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충남의 인물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온몸으로 일어서는 충절의 정신을 보여줬습니다. 이에 밥상뉴스는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과 함께 역사 속 인물들을 중심으로 충남이 지닌 유구한 역사를 되짚어보고, 이를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과 주민들에게 자긍심과 지역사랑을 심어줄 수 있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충남 논산에 위치한 후백제 견훤왕릉
충남 논산에 위치한 후백제 견훤왕릉

견훤은 892년 신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옛 백제지역에 후백제를 세웠다. 901년 신라의 왕족이자 승려인 궁예가 옛 고구려 땅에 뒷날 후고구려라 불리는 태봉을 건국하면서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고, 936년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 세울 때까지 이어졌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체격이 컸다. 그는 신라의 장군이 되어 많은 공을 세웠지만, 가슴 속에는 백제를 잇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견훤은 백제 유민을 모아 나라를 세울 기회를 엿보다가, 신라의 힘이 약해진 892년에 군대를 일으켜 무진주를 차지했다. 그리고 점차 주변으로 세력을 넓혀 900년에는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백제의 도읍이 있던 충남 부여지역에는 ‘산유화가’라는 농요가 전해진다.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공격을 받아 망한 뒤, 수많은 백제 백성이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 가면서 생긴 노래라고 한다.

후삼국시대 영역도
후삼국시대 영역도

산유화가의 노랫말 가운데 ‘오초 동남 가는 배’라는 구절이 있다. 660년 8월에 백제의 왕족과 관리, 백성 등 1만 2000명이 당나라의 포로가 되어 잡혀 가는 모습을 말한다. ‘용머리를 생각하면 구룡포에 버렸으니 슬프구나 어와 벗님 구국 충성 다 못했네’라는 노랫말은 나라가 망한 설움을 표현한다. 산유화가는 비록 나라는 망했지만 백제를 잊지 않겠다는 백제 유민의 마음을 담은 노래다. 견훤이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 지은 것은 이러한 백제 유민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후백제의 힘이 가장 세서 견훤이 신라의 여러 성을 차례로 무너뜨렸다. 927년에는 신라의 도읍인 경주를 공격해서 경애왕을 죽였다. 하지만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고, 견훤의 아들들 사이에서 왕위를 놓고 싸움이 일어나면서 후백제는 큰 위기에 빠졌다.

견훤은 10명이 넘는 아들 가운데 넷째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자 신검과 용검, 양검이 반란을 일으켜 동생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은 금산사라는 절에 가뒀다. 결국 견훤이 고려에 항복하고 왕건을 도와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공격하면서 후백제의 역사는 끝났다.

견훤왕릉비
견훤왕릉비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에는 견훤의 묘가 있다. 후백제 왕 견훤의 무덤이지만, 다른 왕들의 무덤에 비해 초라하다. 이곳에 무덤이 있는 것은 견훤이 죽을 때 후백제를 시작한 완산주 쪽이 바라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움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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