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충남역사] 13. 이성계, 계룡산에 조선 왕궁 주춧돌을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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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충남역사] 13. 이성계, 계룡산에 조선 왕궁 주춧돌을 놓다
  • 이호영 기자
  • 승인 2019.11.12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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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은 산·강·평야가 조화롭게 발달하고, 서해의 풍부한 물산과 편리한 교통으로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불렸습니다. 또한 한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충남의 인물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온몸으로 일어서는 충절의 정신을 보여줬습니다. 이에 밥상뉴스는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과 함께 역사 속 인물들을 중심으로 충남이 지닌 유구한 역사를 되짚어보고, 이를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과 주민들에게 자긍심과 지역사랑을 심어줄 수 있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태조 이성계 어진
태조 이성계 어진

충청도라는 이름이 처음 쓰인 것은 고려시대이지만, 지금처럼 도의 이름으로 자리 잡은 것은 전국을 8도로 나눈 조선시대 이후다. 조선시대 충청도에는 충주, 청주, 공주, 홍주(홍성) 등 4개 목을 중심으로 54개 고을이 있었고, 관리하기 편하게 충청우도(충청남도)와 충청좌도(충청북도)로 나눴다.

1392년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500년 가까이 고려의 도읍이던 개경을 벗어나 새 도읍을 건설하고, 새로운 나라를 열고 싶었다. 이성계는 처음에 한양(서울)을 새 도읍으로 정하고 바로 궁궐을 지으려고 했지만, 대부분 개경에 삶의 터전이 있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성계는 1393년 직접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나서, 신도안(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일대)을 새 도읍지로 정했다. 계룡산 남쪽에 있는 신도안은 먼 옛날부터 이름 높은 계룡산의 신성한 기운이 모인 곳이다. 계룡산을 등지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길게 뻗은 산줄기가 명당으로 여겨졌다.

신도안 궁궐터 주춧돌

신도안이 마음에 든 이성계는 곧바로 궁궐 공사를 시작했지만, 이번에도 신하들의 반대로 1년 만에 공사가 중단되었다. 신도안이 너무 남쪽으로 치우쳤고, 물길이 없어 도읍지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이유였다. 결국 조선의 새 도읍지는 한강이 흐르는 한양으로 결정됐다.

비록 완성되지 않았지만 신도안에는 약 600년 전 궁궐 공사를 벌인 흔적이 지금도 선명하다. 궁궐 기둥을 세우는 주춧돌로 쓰기 위해 가져다 놓은 커다란 돌 115개가 곳곳에 있다. 주춧돌은 대개 가로 1.2미터에 세로 1.8미터 크기로, 궁궐 건축용으로 다듬은 흔적이 있다.

신도안 곳곳에는 궁궐을 상징하는 대궐터, 동문거리, 종로통, 서문거리 등 땅 이름이나 궁궐 공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대표적으로 신도안에는 ‘신털이봉’이라 불리는 작은 언덕이 있는 데, 궁궐 공사에 참여한 수천 수백 명이 신발에 묻은 흙을 턴 것이 산이 되었다고 한다.

태조대왕 태실

한편,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엄마와 배 속의 아기를 이어 주던 탯줄을 항아리에 담아 보관했다.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뜻이다. 태를 담은 항아리는 돌로 만든 태실에 넣어 두는데, 아이가 자라서 왕이 되면 크고 화려한 조형물과 비석을 세운 태실을 새로 만들었다.

태실은 좋은 기운이 있고 이름난 산에 만들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태실은 함경도에 있었는데, 왕이 된 이성계는 자신과 조선 왕실이 오랫동안 번영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더 좋은 땅을 찾아 태실을 옮겼다. 전국을 샅샅이 조사해서 지금의 충남 금산군 추부면에 있는 만인산으로 결정했고, 1393년 1월 태실을 옮겼다. <도움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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