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히스토리] 2006년, 대규모 고려시대 집터가 발견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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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히스토리] 2006년, 대규모 고려시대 집터가 발견되다
  • 이호영 기자
  • 승인 2019.11.1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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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옛 이름은 한밭으로 ‘큰 밭’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대전이라는 이름은 동국여지승람(1487)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지만, 지금의 대전 영역은 조선시대 회덕현, 진잠현, 그리고 공주목 유성지역이 합쳐져서 된 것입니다. 선사 이래 많은 유적과 유물이 쏟아질 만큼 풍요로운 땅이자 저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선비의 고장으로, 현재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요람이자 19개 대학 14만 명의 젊은 인재들이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에 밥상뉴스는 ‘대전 히스토리’ 시리즈를 통해 대전의 역사와 인물들을 되돌아보고 150만 시민들이 지역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을 갖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상대동 고려시대 유적지
상대동 고려시대 유적지

918년 왕건은 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고려(918~1392)를 세웠다.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국가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지방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호족들을 중앙으로 끌어들이는 정책을 폈다.

대전과 공주지역은 일찍이 후삼국 시기에 궁예의 태봉국에 속하였다가 왕건이 왕이 되면서 후백제로 넘어갔다. 934년에 고려로 다시 넘어온 이후 공산성에 군대가 주둔하면서 인근 지역을 다스렸으며, 이후 대전지역은 공주목에 속해 회덕군(현)·진잠현·유성현·덕진현으로 나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려시대 대전지역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적이나 유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최근 고려시대 마을과 건물의 구조를 보여주는 유적이 유성구 상대동 일대와 대덕구 법동에서 발굴됐다.

현재의 유성구 상대동 주변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원골, 중동골, 양촌 등의 작은 마을들로 이루어진 농촌마을이었다. 주변 지역이 개발될 때에도 이 지역은 논과 밭, 전통가옥, 당산나무 등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유성구 상대동 고려시대 대규모 유구의 중앙 누문과 석계단

그러나 2006년 상대동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짓는 공사가 시작되면서 주택과 논밭에 묻혀 있던 고려시대의 마을 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보고서를 바탕으로 마을 구조를 재현해 보면 상대동에는 담장이 둘러싸인 대형 건물터 2개를 중심으로 28개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두 개의 대형 건물에는 우물과 연못도 갖추고 있었다. 원골유적은 대부분이‘ㅁ’자 모양의 가운데 마당을 둔 구조로 일부 건물은 온돌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상대동 유적이 어떤 성격의 건물들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상대동 일대에 유성현의 관아와 광도원이라는 숙박시설이 있었다는 기록과 지명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유성현의 관아와 광도원 관련 유적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현재 동구 마산동에는 미륵원이라는 원이 있었다. 원은 고려와 조선시대 먼 길을 가는 나그네를 보호하고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길이 험한 곳이나 나루 등에 설치한 일종의 여관이었다.

대전 동구 미륵원
대전 동구 미륵원

고려시대 원은 대부분 국가나 사찰에서 설치·운영했지만, 미륵원은 여행자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회덕황씨 가문이 사설로 설치하였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미륵원이 자리한 곳은 서울과 영·호남으로 통하는 길목이므로 여행자들이 많이 다녔던 곳이다. 미륵원이 설치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전통은 고려 말 황연기가 시작한 것으로 3대에 걸쳐 100여 년이나 계속됐다.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고려는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으로 몸살을 앓았다. 특히 왜구는 1350년 충정왕 때부터 고려에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하여 공민왕 이후에는 빈번히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바닷가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이윽고 14세기 후반 우왕 때에 이르러서는 내륙 지역까지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는 대전지역도 왜구의 약탈을 피하지 못하였다. 1380년에는 부여를 거쳐 공격해 온 왜구에게 공주가 함락되었으며, 1382년에는 충남 연산에 있는 개태사를 노략질한 왜구들이 유성까지 쳐들어 왔다.

겁에 질린 주민들이 왜구를 피해 계룡산으로 숨어들자 왜구는 산속까지 따라 들어가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살해했다. 1388년에도 진잠과 유성 일대가 왜구의 침입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는데, 상대동에 있었던 유성현의 관아가 인근 지역으로 옮겨간 것도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도움 : 대전시 문화유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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