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히스토리] 진잠·회덕·유성·덕진… 조선 전기 ‘성장의 기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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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히스토리] 진잠·회덕·유성·덕진… 조선 전기 ‘성장의 기틀’
  • 이호영 기자
  • 승인 2019.11.19 1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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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옛 이름은 한밭으로 ‘큰 밭’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대전이라는 이름은 동국여지승람(1487)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지만, 지금의 대전 영역은 조선시대 회덕현, 진잠현, 그리고 공주목 유성지역이 합쳐져서 된 것입니다. 선사 이래 많은 유적과 유물이 쏟아질 만큼 풍요로운 땅이자 저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선비의 고장으로, 현재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요람이자 19개 대학 14만 명의 젊은 인재들이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에 밥상뉴스는 ‘대전 히스토리’ 시리즈를 통해 대전의 역사와 인물들을 되돌아보고 150만 시민들이 지역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을 갖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조선의 건국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개성을 떠나 새로운 곳에 수도를 정하려 했다. 새 나라인 만큼 고려의 귀족들이 사는 개성을 벗어나 새출발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수도의 후보에 오른 곳은 한양(서울)과 대전 근교의 계룡산 아래(계룡시)였다.

태조는 먼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거둬야 했다.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계획이 실패하자 태조는 곧바로 계룡산 아래에 수도를 정하는 일을 추진했다. 이에 1393년 태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직접 도읍터를 살펴보기 위해 계룡산으로 행차했다.

청주를 거쳐 유성에 도착한 태조는 유성온천에서 하루를 머물고, 다음날 계룡산으로 가서 직접 대궐과 성곽, 각종 시설이 들어설 곳을 살펴보고 돌아갔다. 그러나 계룡산 아래에 수도를 건설하려 했던 계획마저 개국공신 하륜 등의 반대에 부딪혀 중단됐다. 당시 태조가 정해놓은 도읍터는 지금도 ‘신도안’이라 불리고 있으며, 이후에도 수도가 될 만한 명당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전국의 군현제도를 새롭게 바꾸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 무인세력과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는 조선을 건국한 후 한양에 도읍을 정했다. 조선은 건국 후 약 100년간에 걸쳐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여 중앙집권국가의 틀을 마련하였다. 지방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군·현을 두어 수령을 파견하였다.

조선 건국 초의 대전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크게 회덕현과 진잠현, 공주목에 흡수된 덕진현과 유성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회덕현은 현재 동구와 대덕구, 중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며, 진잠현은 유성구 진잠동과 서구 가수원동·관저동 일대이고, 덕진현·유성현은 중구와 유성구 대부분, 서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관청과 학교가 들어서다

독립된 군현이었던 회덕현과 진잠현에는 관아 건물을 비롯하여 공립학교인 향교, 출장이나 여 행 중인 관리들이 묵어가던 객사, 수령의 살림집인 내아, 무기와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 등이 갖춰져 있었다.

회덕현의 관아는 대덕구 회덕동주민센터 옆에 있었다. 지금까지도 읍내동에는 회덕향교를 비롯하여 관아터, 객사터, 감옥터, 그리고 회덕을 거쳐간 관리들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들이 남아 있다.

진잠현의 관아는 기성관이라고 불렸으며, 지금의 진잠초등학교 자리인 유성구 원내동에 있었다. 조선시대 진잠현에는 기성관 이외에도 객사, 무기고, 향교 등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기성관과 진잠향교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기성관은 공무를 수행하던 대청마루와 관리가 잠을 자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조선시대 대전지역의 관아 건물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교육의 바탕을 유교에 두다

조선시대의 교육은 유교에 바탕을 두었으며 주로 가정이나 서당에서 문자를 익히고 유교의 초보적인 지식을 쌓았다. 서울에서는 4부 학당, 지방에서는 고을마다 설치되었던 향교에 들어가 유교 교육을 받았다. 대전지역에도 회덕현과 진잠현에 향교가 설립되었다.

15세기 후반 이래 정계에 진출한 사림의 향촌질서 확립을 위한 노력이 훈구파 억압으로 약화되자 이들은 교육기반의 확대라는 명분을 가지고 서원 건립 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이후의 사림은 서원을 기반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사림세력이 성장하다

사림이란 조선 중기에 사회와 정치를 주도한 세력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지방에 머무르며 학문과 교육에 힘썼던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15세기 후반 집권 세력인 훈구 세력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사림이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배경은 성종의 과감한 인재등용과 관련이 있다. 성종은 합리적이고 온건한 유교 정치를 회복하기 위해 당시에 학문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대거 등용하여 정책을 비판하도록 했다.

사림은 김종직의 문인이 정계에 진출한 이후 점차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여 사림파를 형성했다. 이들이 훈구 세력의 잘못을 예리하게 공격하는 과정에서 두 세력 간의 정치적 다툼이 점차 심해졌다.

마침내 훈구세력은 네 차례의 사화를 일으켜 사림세력을 공격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 네 차례의 사화로 사림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오히려 수적으로 증가함과 동시에 학문적으로도 크게 성장했다.

사림세력이 매우 존경하는 학자로 사육신 중 한 명인 박팽년이 있다. 박팽년은 세조의 부당한 왕위계승에 저항하다가 순절해 도덕과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 세력의 존경을 받았다. 그 박팽년의 유허가 대전 가양동에 위치하고 있다.

중종 때는 대전·충청 지역이 사림파의 새로운 근거지가 되었는데, 중종 때에 실시된 현량과의 급제자를 분석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당시의 현량과 급제자는 모두 28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충청도 출신이 8명이나 되었다. 이는 사림 세력이 충청도 지방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김정(1486~1521)이다. 그는 대전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인물로 18세 때 계족산 법천사에 들어가 공부했던 적이 있다. 이때 문장을 잘 지어서 송여해의 칭찬을 받고 친분이 생긴 인연으로 그의 조카딸과 결혼했으며 청년기부터는 대전에 집을 짓고 살았다. <도움 : 대전시 문화유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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