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히스토리]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지탱한 성리학·예학의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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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히스토리]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지탱한 성리학·예학의 중심
  • 이호영 기자
  • 승인 2019.11.22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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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옛 이름은 한밭으로 ‘큰 밭’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대전이라는 이름은 동국여지승람(1487)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지만, 지금의 대전 영역은 조선시대 회덕현, 진잠현, 그리고 공주목 유성지역이 합쳐져서 된 것입니다. 선사 이래 많은 유적과 유물이 쏟아질 만큼 풍요로운 땅이자 저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선비의 고장으로, 현재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요람이자 19개 대학 14만 명의 젊은 인재들이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에 밥상뉴스는 ‘대전 히스토리’ 시리즈를 통해 대전의 역사와 인물들을 되돌아보고 150만 시민들이 지역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을 갖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임진왜란 침입경로
임진왜란 침입경로

임진왜란은 조선 사회를 송두리째 뒤흔든 사건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토지는 황폐해졌으며, 경복궁과 같은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불타 사라졌다. 양반 중심의 신분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시대를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누고 있다.

대전지역 역시 임진왜란의 소용돌이를 피하지는 못하였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6월 일본군이 회덕현을 침입하여 백성들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1597년 일본군이 다시 조선을 총공격한 정유재란 때 권율은 공주와 회덕의 경계 부근에서 충남 금산군 진산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충청 병사 이시언은 회덕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임진·정유년에 일어난 왜란 당시 박사진, 연희·연복 형제, 강천상·강옥상 형제, 강절 등 많은 대전 출신 사족들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했다. 일본군이 물러가고 난 후인 1602년엔 지금의 도청에 해당하는 충청도 감영이 대전과 가까운 공주에 자리를 잡았으며, 이에 따라 대전은 감영의 배후도시 역할을 하게 됐다.

우암 송시열 선생
우암 송시열 선생

한편, 16세기 후반 조선에서는 성리학이 크게 발달하면서 이황과 이이를 중심으로 각각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양대 산맥이 형성됐다. 이이의 기호학통이 충남 논산의 김장생에게 이어지면서 호서학파를 형성, 대전지역 사림들이 그 가르침 아래에서 크게 성장했다.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는 송시열, 송준길, 권시, 이유태 등을 비롯한 400여 명의 문인이 배출됐다. 특히 송시열은 당시 학문과 사상, 정치를 주도하면서 문하에서 1000여 명의 제자가 배출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이런 이유로 17세기 후반부터 대전은 성리학과 예학의 학문적 중심지로 발전했고, 큰 학자와 충절의 인물이 많이 배출되고 예절을 잘 지켜 선비의 고장으로 이름나게 됐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예학이 발달하고 예론이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유례없는 두 번의 큰 전쟁을 통해 양반의 지배체제가 뿌리째 흔들리게 된 데 따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예(禮) 질서의 회복이 시대적 과제로 부각됐고, 성리학적 명분론과 예 질서의 확립으로 양반 중심의 신분제와 사회기강을 다시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사회가 안정을 되찾으며 조선 초 3000여 명에 불과했던 대전지역 인구도 18세기 중반엔 2만 4000여 명으로 크게 늘었다.  <도움 : 대전시 문화유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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