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옛 이름은 한밭으로 ‘큰 밭’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대전이라는 이름은 동국여지승람(1487)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지만, 지금의 대전 영역은 조선시대 회덕현, 진잠현, 그리고 공주목 유성지역이 합쳐져서 된 것입니다. 선사 이래 많은 유적과 유물이 쏟아질 만큼 풍요로운 땅이자 저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선비의 고장으로, 현재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요람이자 19개 대학 14만 명의 젊은 인재들이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에 밥상뉴스는 ‘대전 히스토리’ 시리즈를 통해 대전의 역사와 인물들을 되돌아보고 150만 시민들이 지역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을 갖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동족마을’이란 본관과 성이 같은 친족들이 함께 모여 사는 마을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른 말로는 같은 성씨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동성마을, 동족촌’이라고도 하고, 같은 성씨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집성촌’이라고도 한다.
동족마을은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단결이 잘 되었고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의 관계도 엄격히 지켜졌다. 동족마을의 등장은 임진왜란 이후에 나타나는 아버지계 중심의 친족관계 형성과 관련이 깊다.
조선 후기에는 개인보다 문중이 우선시 되었다. 이에 따라 문중을 중심으로 족보가 편찬되기도 하고, 특정 가문의 조상을 기리는 서원이나 사우를 세우는 일이 많아졌다. 이는 조선 전기에 대전에 이미 터를 잡은 힘 있는 가문들과의 혼인을 통해 그 지역으로 이사하여 함께 살아가던 모습과는 좀 다른 모양새이다.
대전의 경우 동족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에 대전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은진송씨(대덕구 중리동·송촌동, 동구 이사동·판암동), 충주박씨(서구 도마동·가장동·도안동, 유성구 상대동), 안동권씨(서구 탄방동, 중구 무수동), 여흥민씨(유성구 도룡동, 대덕구 삼정동) 등은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그 세력을 유지하며 동족마을을 유지해 갔다.
16세기 이후 새로 형성된 동족마을은 매우 많았다. 유성구 전민동은 광산김씨가 모여 살던 곳이다. 유성의 광산김씨는 김장생의 아들 김반(1580~1640)이 병자호란 이후 대전에 처음 뿌리를 내린 이후부터 전민동 일대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회덕, 진잠, 탄동 등에는 경주김씨들의 마을이 있었다. 경주김씨는 중종 때의 사림인 김정과 김광유가 은진송씨에게 장가들면서 대전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동구와 대덕구에서 살았으나 17세기 초부터는 진잠, 탄동 지역에서도 살아왔다.
원신흥동과 관저2동에는 수원백씨의 마을이 있었다. 이들은 본래 충청남도 금산에서 살다가 16~17세기경 백운공이 진잠으로 이사 온 후부터 후손들이 대대로 진잠 일대에서 살았다.
이밖에도 유성구 지족동엔 남양홍씨, 유성구 갑동과 회덕동엔 연안이씨 등 대전지역 곳곳에 동족마을이 형성됐다. <도움 : 대전시 문화유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