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충남역사] 17. 조헌과 700의병, 조선에 목숨을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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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충남역사] 17. 조헌과 700의병, 조선에 목숨을 바치다
  • 이호영 기자
  • 승인 2019.11.29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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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은 산·강·평야가 조화롭게 발달하고, 서해의 풍부한 물산과 편리한 교통으로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불렸습니다. 또한 한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충남의 인물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온몸으로 일어서는 충절의 정신을 보여줬습니다. 이에 밥상뉴스는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과 함께 역사 속 인물들을 중심으로 충남이 지닌 유구한 역사를 되짚어보고, 이를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과 주민들에게 자긍심과 지역사랑을 심어줄 수 있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충남 금산 칠백의총 전경
충남 금산 칠백의총 전경

1592년 20만 명이 넘는 왜군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겨우 18일 만에 한양을 차지했고, 왕은 피란을 떠나야 했다. 조선은 그야말로 거센 바람 앞에 등불처럼 큰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일본 수군을 연이어 물리치고, 육지에선 의병이 왜군을 막아 냈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바닷길이 막힌 왜군은 본국에서 식량과 무기 등을 제대로 보급받을 수 없었다.

조헌 장군 영정
조헌 선생 영정

왜군은 최대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역을 차지해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금산은 전라도로 들어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다. 왜군은 1592년 7월 전라도로 가기 위해 금산을 점령하고, 전주성으로 가는 길목인 웅치와 이치를 동시에 공격했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조선 관군과 의병에게 왜군도 많은 피해를 당했고, 의병장 고경명이 금산성을 공격하는 바람에 왜군은 전주성까지 진격하지 못한 채 금산으로 돌아와야 했다.

고경명 장군과 의병 수천 명이 7월에 금산성을 되찾기 위해 벌인 싸움을 ‘1차 금산전투’라 부른다. 아쉽게도 이때는 금산성을 되찾는 데 실패했다. 한 달쯤 지나 의병장 조헌과 영규대사는 ‘2차 금산전투’를 계획했다.

8월 1일 조헌의 의병은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군과 함께 왜군이 점령한 청주성을 되찾고, 8월 18일 전라도로 진격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성을 공격했다. 처음에는 한양으로 가려고 했지만,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는 일이 더 급하다고 판단하여 방향을 돌린 것이다.

금산혈전출진도(錦山血戰出陳圖), 임진년 8월 16일 조헌 선생과 영규대사가 금산의 왜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공주에서 유성을 거쳐 금산으로 진격하고 있는 모습이다.

조헌과 영규대사는 관군과 힘을 합치려는 계획이 어긋나면서 의병 700여 명으로 금산성에 있는 왜군과 싸웠다. 이 싸움에서 의병장 조헌과 700여 명의 의병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비록 전투에서 이기지 못했지만, 의병들의 희생 덕분에 전라도 지역을 지켰다.

1·2차 금산전투에서 큰 피해를 본 왜군은 힘을 잃고 경상도 지역으로 후퇴했다. 금산전투는 왜군에게 밀리기만 하던 임진왜란 초반, 조선이 역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도움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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