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히스토리] 전국 최초 항일의병이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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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히스토리] 전국 최초 항일의병이 일어나다
  • 이호영 기자
  • 승인 2019.12.03 17: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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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옛 이름은 한밭으로 ‘큰 밭’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대전이라는 이름은 동국여지승람(1487)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지만, 지금의 대전 영역은 조선시대 회덕현, 진잠현, 그리고 공주목 유성지역이 합쳐져서 된 것입니다. 선사 이래 많은 유적과 유물이 쏟아질 만큼 풍요로운 땅이자 저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선비의 고장으로, 현재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요람이자 19개 대학 14만 명의 젊은 인재들이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에 밥상뉴스는 ‘대전 히스토리’ 시리즈를 통해 대전의 역사와 인물들을 되돌아보고 150만 시민들이 지역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을 갖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동학농민운동 기록화
동학농민운동 기록화

19세기는 세도정치로 왕권이 약해졌고 관료체제가 크게 흔들렸다. 게다가 자연재해가 잇달아 일어나면서 흉년으로 먹을 양식이 부족하고 질병이 발생하여 인구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각종 세금을 거두어들여 백성의 불만이 점점 커지게 됐다. 1862년 삼남지역 농민봉기의 영향으로 대전지역에서도 회덕 농민들이 봉기했다. 이때 농민들은 관아에 몰려가 항거하였으며 부패한 관리와 부자들의 집을 불태우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발생한 진잠 농민봉기도 회덕 농민봉기와 그 규모와 양상이 거의 같은 농민 항쟁이었다.

1894년 농민들은 정치가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외국 세력의 침략에 반대하는 대규모의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같은 해 3월에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휩쓸자 충청도 동학교도 수천 명이 보은 청산을 떠나 남접 세력과 합류하기 위하여 공주목과 진잠현의 경계인 성전평(유성구 학하동)을 차지했다.

5월 13일에는 회덕을 공격한 다음 다시 진잠에 모였다. 이때 모인 동학교도는 충청도의 교인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가운데 공주목, 회덕현, 진잠현 등지의 동학교도도 이에 합세했다. 진잠에 모였던 동학농민군은 일단 해산한 다음 동학농민군이 2차로 일어나 북쪽으로 향할 때 우금치(공주) 전투에 다시 참여했다.

하지만 농민군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동학농민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외국 세력에 대항하고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기회를 만든, 큰 범위의 근대 민족운동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

유성의병사적비
유성의병사적비

이후 일본이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하자 러시아는 일본의 요동 진출을 억누르고 남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에 압력을 가했다. 이때 일본에 불만을 품고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가 러시아 세력을 이용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자 일본은 을미사변을 저지르고 을미개혁을 추진했다.

이로 인해 국민들이 분노하였고 여러 형태의 반발과 의병이 일어났다. 대전지에서도 유성장터에서 문석봉 의병부대가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을미사변 이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의병으로 대전지역 양반과 농민들을 중심으로 조직됐다.

이들은 먼저 회덕현 관아를 급습하여 무기를 빼앗았다. 무장을 갖춘 300여 명의 의병은 공주 공암을 거쳐 공주목으로 진격했고, 공주의 와야동(공주시 소학동)에서 관군과 일전을 벌였으나 전투에서 패하였다. 항일 의병운동은 나라를 지키고자 일본과 맞서 싸운 항일투쟁이었다.  <도움 : 대전시 문화유산과>

유성문화원 주관 2019 유성장터 만세운동 모습
유성문화원 주관 2019 유성장터 만세운동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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