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충남역사] 19. 반란을 피해 공주로 피신한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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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충남역사] 19. 반란을 피해 공주로 피신한 인조
  • 이호영 기자
  • 승인 2019.12.1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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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은 산·강·평야가 조화롭게 발달하고, 서해의 풍부한 물산과 편리한 교통으로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불렸습니다. 또한 한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충남의 인물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온몸으로 일어서는 충절의 정신을 보여줬습니다. 이에 밥상뉴스는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과 함께 역사 속 인물들을 중심으로 충남이 지닌 유구한 역사를 되짚어보고, 이를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과 주민들에게 자긍심과 지역사랑을 심어줄 수 있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인조를 모신 파주 장릉
인조를 모신 파주 장릉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크게 패한 왜군이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가면서 7년 가까이 계속된 임진왜란이 끝났다. 하지만 오랜 전쟁에 따른 혼란은 한동안 계속됐다. 조선의 15대 왕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왕으로 모신 ‘인조반정’도 이런 혼란 속에서 일어났다.

조선의 14대 왕 선조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세자가 됐으며, 한양을 버리고 피난 간 선조를 대신해서 조선의 군대를 이끌며 활약했다.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국력을 키우고 백성을 돌보는 데 힘 썼지만 자신의 왕위를 위험하게 하는 형제를 죽이고 인목대비를 가두면서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또한 중국대륙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후금(청)과 외교를 맺었는데, 광해군을 비난하는 신하들은 이를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준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반대파는 1623년 반란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조선의 16대 왕으로 세웠다. 이 사건이 인조반정이다.

공주 공산성
공주 공산성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1년 만에 이괄 장군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궁궐을 버리고 공주까지 피해야 했다. 이괄 장군은 인조를 왕으로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생각만큼 좋은 상을 받지 못해서 불만을 품었다가 반역자라는 의심까지 받자 반란을 일으켰다.

한양을 반란군에게 빼앗기고 남쪽으로 피신한 인조는 공주 공산성에서 열흘 정도 머물렀다. 조선시대에 전쟁이 아닌 반란으로 왕이 한양을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피신 한 것은 이때뿐이다.

공산성 쌍수정
공산성 쌍수정

인조는 공산성에 머무는 동안 두 나무에 기대어 서서 멀리 북쪽의 궁궐을 바라보며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반란을 진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조는 기쁜 마음에 공주 공산성의 두 나무에게 높은 벼슬을 내렸다.

공산성에 있는 쌍수정은 ‘나무 두 그루가 있는 정자’라는 뜻으로, 인조가 나무에 벼슬을 내린 것을 기념해서 세운 정자라 한다. 정자가 세워진 다음 공주 공산성은 ‘쌍수산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도움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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