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충남역사] 21. 내포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한 이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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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충남역사] 21. 내포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한 이존창
  • 이호영 기자
  • 승인 2019.12.26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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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은 산·강·평야가 조화롭게 발달하고, 서해의 풍부한 물산과 편리한 교통으로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불렸습니다. 또한 한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충남의 인물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온몸으로 일어서는 충절의 정신을 보여줬습니다. 이에 밥상뉴스는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과 함께 역사 속 인물들을 중심으로 충남이 지닌 유구한 역사를 되짚어보고, 이를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과 주민들에게 자긍심과 지역사랑을 심어줄 수 있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충남 예산  여사울성지 이존창 선생 생가터
충남 예산 여사울성지 이존창 선생 생가터

1400~1600년에 유럽인은 세계 곳곳을 탐험하며 무역을 하고, 식민지를 만들면서 선교사를 보내 천주교를 널리 퍼뜨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온 계기는 다른 나라와 달랐다. 선교사가 천주교를 전해 준 것이 아니라, 호기심으로 서양 학문을 공부하다가 이를 종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중국에 천주교가 전해진 뒤 중국의 도읍인 베이징에는 천주교 성당이 세워졌고, 선교사들은 이곳에서 천주교뿐만 아니라 서양의 과학과 기술 등을 가르쳐 주었다. 1600년쯤 천주교와 서양의 책이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서양 학문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몇몇 사람은 사신을 따라 베이징에 가서 유럽인 선교사들을 만나 이야기하기도 했다.

처음에 ‘서양 학문’이라는 뜻에서 ‘서학’으로 불리던 천주교는 나중에 종교로 받아들여졌다. 1780년대에 한양과 경기도 지역에 사는 젊은 학자들이 천주교를 믿었는데, 충청도 여사울(예산군 신암면 종경리) 출신 이존창도 그중 한 명이었다.

1784년 세례를 받고 충청도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가 된 이존창은 고향 예산으로 내려와 천주교를 전파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몇 해 지나지 않아 고향 마을 여사울을 비롯해 예산, 당진, 아산, 서산 등 서해와 가까운 충청남도 내포지역 곳곳에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

하지만 얼마 뒤 나라에서 천주교 신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천주교 신자들이 조상에게 절하는 유교식 제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충남 당진 솔뫼성지 김대건 신부상
충남 당진 솔뫼성지 김대건 신부상

천주교 박해는 전국에서 천주교 신자가 가장 많은 내포지역에 집중됐다. 조선 정부는 1800년대 후반까지 천주교 박해를 계속했다. 특히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가 붙잡혀 고문을 받고 처형되었다. 이 기간 내포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내포와 충청도 일대에 천주교를 퍼뜨린 이존창도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충남 청양 새터성지 최양업 신부 생가터
충남 청양 새터성지 최양업 신부 생가터

내포지역에서는 어려운 상황에도 한국인 최초 신부인 김대건(당진 출신), 두 번째인 최양업(청양 출신) 신부가 나왔다. 내포의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전국으로 흩어지면서 천주교가 널리 퍼지기도 했다.

이처럼 내포지역은 큰 박해를 당하면서도 천주교가 한국에 뿌리내리는 데 큰 몫을 했고, 그런 이유로 ‘한국 천주교의 요람’, ‘한국 천주교의 못자리이자 묏자리’라고 불린다. <도움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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