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충남역사] 23. 동학농민군, 내포에서 최후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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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충남역사] 23. 동학농민군, 내포에서 최후를 맞다
  • 이호영 기자
  • 승인 2020.01.09 16: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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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은 산·강·평야가 조화롭게 발달하고, 서해의 풍부한 물산과 편리한 교통으로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불렸습니다. 또한 한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충남의 인물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온몸으로 일어서는 충절의 정신을 보여줬습니다. 이에 밥상뉴스는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과 함께 역사 속 인물들을 중심으로 충남이 지닌 유구한 역사를 되짚어보고, 이를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과 주민들에게 자긍심과 지역사랑을 심어줄 수 있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동학농민운동 기록화
동학농민운동 기록화

조선은 오랫동안 나라의 문을 닫고 외국과 교류를 금지했다. 그러다 1876년 일본의 공격을 받고 강화도조약을 맺은 뒤 미국, 영국 등과 잇달아 조약을 맺으며 통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이 맺은 조약은 강대국에게 유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외국에서 만든 값싼 물건이 들어오고 쌀 같은 곡물이 빠져나가면서 수공업자와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졌던 것이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태어난 종교가 동학이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옛날부터 전해 오는 민간 신앙에 유교와 불교, 도교를 합쳐서 만든 민족 종교다. 최제우는 신분에 따른 높고 낮음이 없고, 사람은 누구나 하늘처럼 소중하다고 가르쳤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은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많은 사람이 동학을 따랐다.

조선 정부는 동학을 힘으로 억눌렀다. 견디다 못한 동학 교인과 백성은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군에서 무기를 들고 싸우기 시작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이 온갖 방법으로 백성을 못살게 굴자, 동학 지도자 전봉준이 동학군을 일으킨 것이다.

비슷한 처지에 있던 주변의 농민들이 함께하면서 동학 농민군은 전라도 전체를 점령했다. 놀란 조선 정부가 동학군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싸움을 잠깐 멈췄다. 하지만 조선의 정부는 동학군 몰래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를 불러들여 동학군을 진압하려고 했다.

공주 우금치 동학혁명군 위령탑
공주 우금치 동학혁명군 위령탑

정부의 속셈을 눈치챈 동학군은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전라도뿐 아니라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 등 전국 각지의 동학 농민군이 동시에 일어났다. 전라도에서 올라온 동학군과 충청도의 동학군은 중간 지점인 공주에 모여서 한양으로 진격하고자 했다.

기관총을 비롯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연합한 조선 정부의 군대는 공주 우금치에 모여 동학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동학군은 우금치를 여러 번 공격하여 치열하게 싸웠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우금치에서 전투를 벌이는 사이에 전국 곳곳에서도 동학군과 관군,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태안, 서산, 당진, 예산, 아산 등 충청남도 내포 지방에서도 동학군 수만 명이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고, 승전곡(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과 관작리(예산군 예산읍 관작리) 전투에서는 일본군과 관군을 크게 이겼다. 동학 농민군은 뒤이어 내포 지방의 중심인 홍주성을 공격했으나, 우금치의 동학군과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결국 남은 동학군은 일본군과 관군에 쫓기다가 붙잡히거나 처형되었다. 태안 백화산에 있는 교장바위는 그때 내포 동학군을 잔인하게 죽인 처형지로 알려졌으며, 그 아래 동학군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탑이 세워졌다. <도움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태안 백화산 동학혁명군 추모탑
태안 백화산 동학혁명군 추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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