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와 선교, 무엇이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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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교와 선교, 무엇이 옳은가?
  • 탄탄(용인대 객원교수)
  • 승인 2020.02.28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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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모든 종교는 자신들 교조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는 일에 사활을 건다. 특히 신생 종교, 또는 세간에서 사이비라고 지칭되는 교단이나 집단의 극에 이른 선교 행위는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도를 넘기가 일수였다.

선교의 역사는 예수가 신으로부터 파견된 것에서 시작되며,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도(使徒)들의 파견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므로 선교의 의미 안에는 파견이라는 뜻과 복음의 전파를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 선교의 사명은 교회에 부여되어 있고, 교회는 그것을 처음으로 설립한 그리스도의 명에 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교회를 부식하는 임무를 수행하고자 한다.

그동안 기독교계에서는 선교나 전도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고 불교에서는 포교(布敎)라 하여 불도를 전파하여 왔고, 이후 포교는 언제부터인지 기독의 가르침을 선전하여 널리 편다는 선교(宣敎)와 확연히 구별되는 용어로 사용됐다. 전도란 뜻도 비슷하지만 주로 전도는 같은 언어·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종교를 전파한다는 뜻으로, 선교는 다른 언어·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전파한다는 뜻으로 공공연하게 쓰였다.

다시 말해 주로 개신교계에서는 불교와 구별하여 자신들의 교리를 널리 알리고 신도를 포섭하는 행위를 선교(宣敎)라는 단어를 써왔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원래 전도 역시 불교에서 쓰던 단어였지만, 현재 불교에서는 교리를 펴고 신도를 절에 나오게 하는 행위를 포교(布敎)라 하여 주로 쓰며, 시험을 쳐 일정한 자격을 갖춘 이를 포교사(布敎師)라고도 한다. 기독에서는 선교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일러 선교사라 하는데, 선교사는 성직자와 수도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평신도도 일정한 교육을 받으면 될 수 있다.

여러 사전을 찾아보니, 역시 기독의 신앙을 선전하여 널리 펴는 일을 뜻하는 기독의 용어가 선교였다. 파견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미션(missio)’에서 따온 종교적 용어다.

교회는 각지에 선교단체를 설립하거나 선교사들을 파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교사들은 초대 교회 사도들의 계승자라 하며, 선교가 지향하는 목적은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인간을 해방시키고 신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기독인의 지상의 목표이며, 이를 사회구조면에서 본다면 독립된 그리스도적 공동체, 즉 교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의도에서 설립된 교회는 또한 새로움과 젊음을 유지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선교활동을 지속한다.

다시금 말하면 예수가 이 땅에 다시 올 때까지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한 인간이 진실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정신에 따라 스스로의 생활을 변화시키려면 참된 회개, 즉 마음의 쇄신이 필요하게 되고, 이 쇄신을 인간들 마음에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선교의 주체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가 먼저 쇄신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이 쇄신을 기반으로 한 복음전파 활동을 통해서 교회는 선교 본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하며, 선교의 대상에는 인간이 이루는 여러 가지 사회관계, 즉 가정·사회·국가뿐만 아니라 인간활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분야가 포함된다.

이들 대상에 접근하여 복음을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포함되어 있는 지역사회의 성격을 정확히 분석·파악해야 하고, 기존의 사회·문화·종교 등과의 꾸준한 대화도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들 신의 말씀을 토착화하는 일은 선교의 중요한 과제이다.

교회의 선교를 위임받은 사람들은 먼저 교육·의료·자선사업 등 대상지역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일을 해서 지역사회의 관심을 얻게 되는데 이를 예비선교라 하고, 직접 복음을 전달하거나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는 일을 직접선교라 한다.

이 땅에 기독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인 18세기부터이다. 그러나 기독의 전래는 초대 교회의 복음전승이나 일반적인 선교, 즉 선교사의 파견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을 왕래하던 조선 사신들에 의하여 전래된 천주교 서적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라는 한문 천주교서에 담겨 있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일부 조선의 학자들이 수용했던 것이며 이러한 형태의 특이한 복음전파를 가리켜 문서선교(文書宣敎)라 한다.

다만 그 당시에 이미 중국천주교회의 선교사들과 교리상 기독교, 이슬람 등의 유일신교는 종교 중에서도 선교의 의무가 강하다. 다신교는 ‘우리 신 너희 신 모두의 존재 인정, 그러니 우리 신도 같이 믿으실래?’ 같은 식의 온건한 선교가 가능했지만, 교세 확장을 위해 공격적이고 다소 침략적인 선교행위를 몰두하고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기독은 급격히 엄청난 수의 인구가 교회 안에서 득시글거리고 있다.

이에 물질의 한 없는 축복에 배가 터지도록 불러진 목회자의 타락 양상은 이미 세간에 너무도 알려져 있고, 교회의 기능은 이미 그 운명을 다하였다고 보아도 무방할 지경에 이르렀다. 유일신교는 특성상 너희가 말하는 신은 가짜라고 못 박아야만 성립이 될 수 있기에 독선적이며 그 아집이 매우 강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지역사회 전파로 주목을 받고 있는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의 선전 활동을 많은 언론이 ‘포교’라고 보도하자 불교계는 이를 자제해 달라고 엄중히 요청했다.

‘포교’가 불교 용어인데 최근 신천지와 결합하면서 결코 좋지 않은 이미지로 굳어졌다. 기독교계는 정상적인 선전은 ‘선교’로 지칭하고, 이단이나 비정상적 선교 행위는 ‘포교’라는 개념으로 구분해 얄팍한 수작을 부리고 있다. 이는 명백히 도를 넘은 것이며 상식 이하의 짓이고 종교인의 범주를 넘어선 시정잡배 수준의 의도이다.

탄탄(용인대 객원교수)
탄탄(용인대 객원교수)

기성 기독교계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신천지 활동을 선교가 아닌 불교의 포교란 용어를 사용해 포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형성하려는 음흉한 의도와 항간의 기독교의 빗나간 행위를 보며, 도대체 그들이 진정한 종교인의 가치를 아는 자들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세상의 빛과 소금은커녕 가족을 등지게 하는 금수만도 못한 짓을 하며 배은망덕하고 다른 종교에 대한 배려심도 없는 안하무인하는 작태에 심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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