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사랑방] 14년만에 이룬 ‘코리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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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사랑방] 14년만에 이룬 ‘코리안 드림’
  • 잔홍옌(중국)
  • 승인 2020.03.2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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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다문화가족사랑회와 함께 하는 ‘결혼이주여성 한국생활 정착기’(42)

통계청에서 발표한 ‘2017년 다문화 인구동태’ 통계에 따르면 국내 다문화 혼인 비중은 8.3%에 달하고 있으며, 다문화 출생의 비중도 5.2%나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다문화 인구 역시 이미 100만 명을 넘어 본격적인 다문화사회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제는 다문화가족에 대한 인식 개선과 적응에 대한 일방적 강요보다는 상호 동반자적인 관계가 절실해진 이유입니다.

이에 밥상뉴스에서는 대전시 비영리자원봉사단체인 다문화가족사랑회와 함께 ‘결혼이주여성 한국생활 정착기’ 시리즈를 마련하고, 그들의 삶과 가치를 공유하며 함께하는 다문화사회로 나아가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기고자의 사생활 보호 등을 위해 사진은 게재하지 않으니 이해를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잔홍옌 이라고 합니다. 저는 중국어강사이고 2006년에 대전에 왔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고 일한지 벌써 14년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분투하는 동안 대전이라는 이 도시에는 저의 웃음과 눈물의 역사가 기록되었습니다. 이것들은 조금씩 조금씩 쌓여서 저의 소중한 기억이 되었고, 제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동력이 되었습니다.

2006년 말 한국 친구의 도움 아래 저는 중국에서 안정적인 대학직장의 일을 그만두고 하얼빈의 가족들과 작별한 후 ‘코리안 드림’ 대장정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저만의 업적을 이루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손과 발만 있으면 나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뛰어난 인재가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동안 모은 자금으로는 생활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출을 아끼기 위해 한 빌라의 작고 좁은 다락방을 빌려서 살았습니다. 저는 중국어 학원에서 일하면서 최선을 다해 중국어교육 교재와 방법을 연구하고, 수많은 학생들과 교류하며 더 나은 교육 효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비록 생활은 어려웠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며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즐겁게 보냈습니다.

제가 한국에 오고 7개월 후에 제 남편도 이곳으로 왔습니다. 저의 중국어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남편의 도움으로 저희의 생활도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2009년 저희는 새로운 가족인 귀여운 공주님 ‘도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도도의 앳된 얼굴과 빛나는 눈을 보며 저희의 마음은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부모님이 곁에 안 계시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수 없어 저는 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웠습니다. 심지어 밥 먹는 시간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바쁘게 일했습니다. 한번은 도도가 아파서 고열이 났었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아직 일을 하고 있어서 저는 혼자 아이를 안고 애간장을 태우며 병원을 뛰어다녔습니다. 하지만 저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이를 악물며 견뎌왔습니다.

도도는 지금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습니다. 도도의 소원은 김연아처럼 뛰어난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저와 남편은 학비가 얼마가 들던 아이의 꿈을 위해 전력으로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도도를 뛰어난 아이로 키우는 것이 저희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장기간 안정적으로 생활하기 위해 2015년도에 저는 한국 국적을 신청하고 취득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저희 가정은 다문화 가정이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국적이고 남편과 아이는 중국국적을 가지고 있어서 중국과 한국 양국을 출입할 때 아주 편리합니다.

현재 저는 중국어 강의 외에 화장품 대리 구매 일을 시작했고 훠궈 식당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매일 일정을 빈틈없이 계획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밥을 차리고 도도를 등원시킵니다. 그리고 오전에 화장품 회사에서 일을 하고 여러 가게에서 화장품을 구매합니다. 점심에는 식당에 가서 손님을 맞이합니다. 오후와 저녁에는 수업을 하고 도도를 하교 시킨 뒤 다시 피겨스케이팅 훈련장에 데려다 줍니다. 물론 당연히 힘들지만 가정과 아이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견딜 수 있습니다.

점점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저의 노력이 열매를 맺을 때 즈음 저는 인생 최대 고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2018년 6월 13일 저녁 저는 중국에 있는 제 여동생에게서 긴급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동생은 저에게 퇴직 후 노년을 즐기시던 아버지께서 여행을 가시던 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습니다.

순간 저는 머리가 멍해지고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습니다. 저를 그렇게 지켜주고 함께 있어주던, 저와 가장 가까웠던 아버지가 제가 미처 보답해드리기도 전에 그렇게 비통하게 저희의 곁을 떠나신 것입니다. 정말 받아드리기 힘들었습니다.

다음날 저는 바로 가족들과 함께 하얼빈으로 갔습니다. 그 후 저는 슬픔을 삼키고 정신을 깨우며 사고의 전말을 알아보고 변호사를 선임하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어머니를 위로했습니다. 모든 과정들이 정말 견디기 힘들었지만 저는 이 모든 것을 강인하게 대면해야 했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안 계시니 장녀인 제가 가족들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존재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겪고 나서 저는 더욱 성숙해지고 단단해졌습니다. 생활은 눈앞의 안일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시와 머나먼 들판이 있습니다. 제 인생에서 저에게 힘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 시와 머나먼 곳, 그리고 더욱 아름다운 내일을 위해 저는 한국에서 더욱 열심히 분투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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