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뿌리] ‘다산 정약용’으로 대표되는 명가 ‘나주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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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뿌리] ‘다산 정약용’으로 대표되는 명가 ‘나주정씨’
  • 구태경 기자
  • 승인 2020.10.2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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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중구 침산동, 보문산 자락에 위치한 뿌리공원은 1997년 개장한 전국 유일의 효 테마공원이다. 현재 12만 5000㎡의 부지에 240여 문중의 성씨조형물과 함께 전망대, 잔디광장, 산림욕장, 수변무대 등 다양한 시설이 조성돼 있어 연인원 1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뿌리와 효문화의 총집산이 되고 있다. 뿌리공원에 조성된 성씨조형물을 중심으로 각 문중의 유래와 전통을 살펴본다.

나주정(丁) 성씨 한자형태를 위주로 해 왼쪽 구의 형태는 조상의 얼을 표현했고, 후손들이 조상의 얼을 떠받드는 형상으로 표현했다.
나주정(丁) 성씨 한자형태를 위주로 해 왼쪽 구의 형태는 조상의 얼을 표현했고, 후손들이 조상의 얼을 떠받드는 형상으로 표현했다.

나주정씨의 본관은 처음 압해(押解)였다.

압해현은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면으로 고려초에는 나주에 속한 현이었으나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으로 모두 나주로 철수해 한때 무인도가 되자 조선조 태종 9년(1409년)에 이르러서는 폐현됐다.

이러한 연유로 나주정씨는 한동안 관적을 나주압해정씨로 쓰다가 영조 연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나주로 본관을 고쳐 오늘날까지 사용해오고 있다.

고려검교대장군 윤종(允宗)을 시조로 모신 정씨는 그로부터 6세 이르기까지 압해현의 토성(土姓) 호족으로 거주하다가 7세 손원보(元甫)에 이르러 비로소 개경(開京)으로 이주했다.

이후 조선조에 이르러 수강(壽崗)은 성종 때 병조참판으로 문장이 뛰어나 후세에 월헌집(月軒集)을 남겼고, 아들 옥형(玉亨)은 명종 때 좌찬성에 올라 금천군으로 봉군됐고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그의 아들 응두(應斗) 역시 좌찬성으로 시문에도 뛰어난 선비였고 금계군으로 습봉(襲封)되고, 영의정을 추증받았으며,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또, 그의 네 아들 윤조(胤祚), 윤희(胤禧), 윤우(允祐), 윤복(胤福) 또한 모두 지방관찰사, 대사헌 등 고관을 지냄으로써 당시 수도 한양에서 명망 높은 가문으로 성장했다.

숙종 때의 시한(時翰)은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성리학을 깊이 닦아 큰 학자가 돼 우담집(愚潭集)을 남겼고, 영조 때 형조판서를 지낸 범조(範祖)는 문학에도 뛰어난 해좌집(海佐集)을 남기고, 문헌(文憲)이란 시호를 받았다.

특히, 세인이 익히 아는 정조 때의 다산 정약용(若鏞)은 형조 참의까지 지냈으나 백서사건으로 인해 강진에서 17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500여 권의 권위있는 저술을 남겼으며, 문도(文度)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렇듯 나주정씨 문중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왔고 조선왕조에서 무려 49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9대 옥당(玉堂)의 가계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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