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뿌리] 3대에 걸쳐 기로소에 이름 올린 유일 가문 ‘사천목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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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뿌리] 3대에 걸쳐 기로소에 이름 올린 유일 가문 ‘사천목씨’
  • 구태경 기자
  • 승인 2020.10.30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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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중구 침산동, 보문산 자락에 위치한 뿌리공원은 1997년 개장한 전국 유일의 효 테마공원이다. 현재 12만 5000㎡의 부지에 240여 문중의 성씨조형물과 함께 전망대, 잔디광장, 산림욕장, 수변무대 등 다양한 시설이 조성돼 있어 연인원 1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뿌리와 효문화의 총집산이 되고 있다. 뿌리공원에 조성된 성씨조형물을 중심으로 각 문중의 유래와 전통을 살펴본다.

나주정(丁) 성씨 한자형태를 위주로 해 왼쪽 구의 형태는 조상의 얼을 표현했고, 후손들이 조상의 얼을 떠받드는 형상으로 표현했다.
두 사람의 형태가 마주보는 것으로 서로 의지하고 도우는 사천목씨 문중의 화목한 모습을 표현했다.

사천목씨(睦氏)는 선대(先代)가 경상도 사천에 살면서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리 화목·돈독해 화목할 목(睦)자로 성(姓)을 얻게 됐고 본관을 사천(泗川)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국 대부분의 성씨가 본관이 서로 다르나 목씨의 본관이 사천 하나뿐인 것은 그 뿌리가 한명에게서 어어 졌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목씨의 시조는 고려조 무관을 지내신 낭장동정공(郎將同正公 諱 孝基)이고, 2세 합문지후공(閤門祗侯公 諱 德昌)은 고려 원종 10년에 서북방면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고 순국해 충신일등(忠臣一等)으로 영주군(靈州君)에 봉(封)해졌다.

또한, 3세 직제학공(直堤學公 諱 俊平)은 비서성판사(秘書省判事),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목문(睦門)은 고려조부터 가문이 융성해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조선조에서도 많은 정치가와 인재를 배출하여 당당히 명문가의 위치에 올랐다.

시조로부터 6세까지의 묘소(墓所)는 북한에 모셔져 있어 현재 7세 조가 모셔져 있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선영(先塋)내에 단비(壇碑)로 모시고 있다.

고려조에서 무신가문(武臣家門)으로 성망(聲望)이 높았던 목씨는 단본(單本)이라 문중수는 적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33명이 문과급제(文科及第)를 하고, 정승판서를 비롯해 당상관(堂上官) 21명을 배출함으로써 명문대가(名門大家)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특히, 11세조 현헌공(玄軒公 諱 世枰)은 중종때 명현(名賢)으로 이름이 높았고 그의 아들인 두일당공(逗日堂公)은 대사간 이조참판, 도승지등을 지내고 선조 25년 77세에 기로소에 들었으며 영의정의 증직(贈職)과 충정공(忠貞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또, 그의 아들인 수옹공(睡翁公 諱 來善)은 이, 호, 예, 형조판서와 우의정, 좌의정 등을 두루 역임하시고 숙종 14년 71세에 기로소에 들었다.

기로소(耆老所)는 반드시 문과급제를 거쳐 정2품(正二品) 이상의 벼슬을 지내고 수(壽)가 70세 이상의 원로만이 들 수 있는 국가 최고의 예우(禮遇)기구이며, 연(連) 3대에 걸쳐 기로소에 드신 가문은 조선조 500년 동안 유독 목문만 갖고 있는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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