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뿌리] 왜란·호란에 독립운동까지 우국충정의 ‘봉화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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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뿌리] 왜란·호란에 독립운동까지 우국충정의 ‘봉화금씨’
  • 구태경 기자
  • 승인 2020.11.1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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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중구 침산동, 보문산 자락에 위치한 뿌리공원은 1997년 개장한 전국 유일의 효 테마공원이다. 현재 12만 5000㎡의 부지에 240여 문중의 성씨조형물과 함께 전망대, 잔디광장, 산림욕장, 수변무대 등 다양한 시설이 조성돼 있어 연인원 1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뿌리와 효문화의 총집산이 되고 있다. 뿌리공원에 조성된 성씨조형물을 중심으로 각 문중의 유래와 전통을 살펴본다.

조형의 전체 모습은 산의 모양으로 높은 기상과 무궁한 발전을, 무궁화의 모양은 나라를 빛내는 많은 인재를 배출함을, 날개의 형상은 문중 모든 이에 활기찬 모습과 높은 이상을 심어줌을 표현했다.
조형의 전체 모습은 산의 모양으로 높은 기상과 무궁한 발전을, 무궁화의 모양은 나라를 빛내는 많은 인재를 배출함을, 날개의 형상은 문중 모든 이에 활기찬 모습과 높은 이상을 심어줌을 표현했다.

봉화금씨의 시조 영렬공은 고려중엽의 명신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지방을 다스릴 때는 철태수라 불렸다.

또한, 염찰(廉察)로 지방에 나가서는 관리를 단속해 민폐를 일소했으며, 한림학사 때는 많은 제자를 거느려 한림별곡에 금학사의 옥순문생(玉筍門生)이라 읊어졌다.

평장사, 관리부사, 태보를 거쳐 하야하니 삼한벽상공신에 오르고 사후 시호를 영렬(英烈)로 받았다.

후대에 조선조 태조 때 등과해 전라감사, 대사성을 지낸 청백리 청원정공(諱柔)과 세조 때 문·무과에 올라 왕이 베푸는 잔치에서 시를 주고받은 동래공 등 많은 이들이 문·무과에 급제하거나 학행으로 관직에 나가도 벼슬에 연연치 않고 곧 물러나 학덕을 닦았다.

학문계에는 특히 퇴계의 문인이 많은데 선생의 고제로 명필 매헌공(諱輔), 학행으로 봉화현감을 지낸 성재공(諱蘭秀), 학문과 덕행으로 오천군자(烏川君子)라 일컫던 일 휴당(諱應來)과 면진재공(諱應壎), 송우암의 고제에 수경재공(諱鳳儀)도 있었다.

또, 온갖 설화를 남긴 효자들이 있고 우국충정으로 임진왜란 시 중봉(重峰)선생과 함께 창의해 청주에서 대첩을 거둔 후 금산에서 전사한 덕운재공(諱應信) 등 많은 이의 공신록권과 창의록에 있고, 병자호란의 굴욕에 분격한 숭정처사(崇禎處士)도 있었으며 일제에 항쟁한 독립유공자도 많았다.

이렇듯 봉화금씨는 효제신양(孝悌信讓)의 가훈을 부위공파, 동래공파, 군위공파, 장사공파, 관찰공파, 사정공파, 판서공파로 나눠 전국에 퍼져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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