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호의 조합장 일기] 농사 끝자락 가을날의 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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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의 조합장 일기] 농사 끝자락 가을날의 반추
  • 임영호 동대전농협 조합장
  • 승인 2020.11.1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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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1913~1975) 시인의 《가을의 기도》입니다. 지난 주말에 밭에 가서 된서리에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무를 거두었습니다. 올해는 마지막 농사일이 될 것 같습니다.

한 해의 흔적이 밭 이곳저곳에 가득합니다. 한 해 동안 무엇을 했나 헤아려봅니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 땅콩, 무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수확이고 나누는 일입니다. 항상 수확이 생각보다 많아 어떻게 할까 고심합니다.

그런데 초봄에 고라니가 이파리라도 뜯어 먹으면 속상해하고 못 오게 울타리를 칩니다. 가을날 산비둘기라도 밭에 앉으면 마음이 심란합니다. 밭고랑에 간밤에 두더지 간 길이 터널처럼 높아 있으면 발길질이 그냥 갑니다. 생각이 없습니다.

심을 때는 되도록 많이 심으려고 생각 없이 바짝바짝 심습니다. 모든 작물이 따스한 햇볕을 충분하게 받고, 풋풋한 바람이라도 마음껏 호흡하게 하려면 공기가 무사통과하도록 띄어서 큰 간격으로 심어야 합니다. 그렇게 안 되니 이것도 숙제입니다.

겉으로 부자지만 마음은 가난합니다. 봄바람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누군가의 혹독한 겨울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는 날이 내 마음에 찾아오기나 할까. 조용한 봄비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없나 반성합니다. 두보(杜甫)의 ‘춘야희우(春夜喜雨)’, 봄밤에 내리는 반가운 비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좋은 비
시절을 알아
봄이 되어 내리니 만물이 싹튼다
바람을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
만물을 적시니 가늘어 소리도 없구나

好雨知時節 當春乃發生
隨風潛入夜 潤物細無聲


봄비가 때맞춰 내려 만물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봄비가 낮에 내리지 않고 밤에 옵니다.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를 배려하는 고마운 비입니다. 삼라만상에 생명수를 공급하지만, 빗줄기가 가늘어서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조금 지나면 나무는 겨울을 대비하여 잎을 바람에 땅으로 보내고 홀로 서 있을 것입니다. 한 해의 끝을 알리는 한 구간 생애의 마무리를 짓는 신호입니다. 이럴 때면 만물은 마음속으로 들어가 혼자가 됩니다. 한 해 동안 무엇을 했나, 어떻게 했나 반추합니다. 아름다움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입니다.

임영호 동대전농협 조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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