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호의 조합장 일기] 세한도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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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의 조합장 일기] 세한도의 교훈
  • 임영호 동대전농협 조합장
  • 승인 2021.01.11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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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초부터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게다가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강추위가 연일 계속됩니다. 산에는 눈꽃이 피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유독 소나무는 추운 겨울 산을 푸르게 해주어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느끼게 합니다.

1844년 일이었습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제주도에 유배 온 지 5년째 되는 해에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3~1865)이 역관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갑니다. 그는 귀국 길에 책 120권을 사서 추사에게 보냅니다. 국가의 책 심부름도 많았지만 제자는 힘없는 스승을 잊지 않았습니다. 추사는 감격했습니다.

제주도 유배는 이제 정치생명이 끝났고, 거기서 살다 죽으라는 의미입니다. 이상적은 끈 떨어진 스승을 향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추사는 역적이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쓴 마음이 더없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유배지에서 붓을 들어 세한도(歲寒圖)를 그립니다. 이 그림은 소박한 초가집을 사이에 두고 노송(老松)과 청송(靑松) 각각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구도에다가 건너편에는 또 두 그루의 잣나무가 서 있습니다.

추사가 이 그림 속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린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논어(論語)의 자한편(子罕編) 27장에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子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는 글이 있습니다. 한여름에는 다 푸르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추위가 닥치면 어떤 나무가 푸르고 어떤 나무가 늦게 시드는가를 안다는 뜻입니다.

잘나갈 때는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던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대문에 새 잡는 그물을 칠만큼 발길이 끊깁니다. 생사가 판가름 날만큼 다급할 때,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몰락할 때 진짜와 가짜 인심이 나타납니다. 신의를 가졌다는 친구도 세력이 다하고 별 볼 일 없으면 가을바람에 낙엽처럼 관계가 끊김을 목격합니다.

추사의 제주도 유배생활은 외롭고 고독했습니다. 그림 속에서 사람 하나 없는 덩그런 집에 추위에 얼어붙은 찬기가 가득합니다.

누구에게나 시련의 시간은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7년 늦게 야간대학을 들어가서 공부할 때입니다. 장학금을 타지 못하여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신청하려고 하니 주위에 보증 설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보증이 지금보다 까다로웠습니다.

1차 등록 기간이 지나고 2차 등록 기간이 닥쳐올 때 가망이 없어 학교 근처 밭둑에 처연하게 앉아 있을 때 나에게 선뜻 보증을 서주겠다는 같은 반 학우가 나타났습니다.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보고 격려해 주고 손을 잡아준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그나마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을 겁니다.

작년에 긴 장마로 모든 작물이 흉년이 들었습니다. 복숭아도 포도도 당도가 나오지 않아 우리 마트에 감히 팔러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 나는 어떻게 했나 더듬어 봅니다. 나도 그분들에게 소나무 같은 사람이 되었나 하는 반성입니다.

새해 2021년 초 우리 농민들이 겪는 황량한 겨울 추위에 세한도(歲寒圖)를 보는 느낌이 특별합니다.

임영호 동대전농협 조합장
임영호 동대전농협 조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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