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南)씨는 연원이 장원하고 계보가 화창하니 영의공 휘 민(敏)이 고덕으로 사성득명하여 가문을 열고 시조가 되었으며 그 자손들이 번성하더니 고려 중엽에 영양 의령 고성 삼파로 분관하였다.
고성남씨는 관조 휘 광보(匡甫)의 덕화로 사대부가 연이어 나왔다. 8대손 휘 기(奇)는 고려말 공안부윤을 지냈으나 이조의 입국에 즈음하여 높은 절의를 지켜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아들 도암 휘 금(琴)은 태종조의 명신으로 병조판서에 올랐으며 좌의정에 증직되었으니 창문과 중문 참봉 의문 직제학 수문 진사 익문 등 5남을 두어 모두 학행이 뛰어나 5봉(鳳)이라 칭했다. 특히 넷째인 경재공은 학덕과 웅문으로 일세의 큰 스승이 되기에 동국명문선에 뽑히고 세종의 신임이 두텁고 사림의 칭송이 융성하니 공의 부자에 이르러 영의공 이래의 학문이 꽃을 피웠다.
그 후로 충효 절행과 학문으로 이름을 떨친 이가 많아 청절 문풍의 전통을 뚜렸이 세웠다. 전한 송파공 휘 세주는 문학이 뛰어나 크게 드날릴 것을 기대했으나 연산조의 어두운 세월을 만나 간언하다가 죽으니 그 충절이 천고에 빛나고 사인 우천당 휘 봉년과 전적 서계공 휘 추는 정암 선생에게 배워 학행이 출충했으나 청절로 일관하다가 영달치 못하였다.
그 뒤는 부사 휘 규년과 참봉 휘 인 찰방 삼괴당 휘 지언과 직장 휘 경효 등에 걸쳐 그 충효 정절 문행이 커다란 계맥을 이루어 왔다. 이러한 가문이 두어번 사화를 만나 사방으로 낙향하니 봉사 휘 신은 동생 휘 임과 같이 대전 석교동에 이거 정착하였고 그 현손 형조참의 휘 분붕은 높은 벼슬을 사양하고 봉소루를 지어 후생의 강학에 전념하였다. 그 후손들은 340여년이나 유산과 가문을 지켜 발전시키며 내일의 번영을 기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