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사랑방] 여정정의 한국 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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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사랑방] 여정정의 한국 적응기
  • 여정정(중국)
  • 승인 2021.02.22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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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다문화가족사랑회와 함께 하는 ‘결혼이주여성 한국생활 정착기’(65)

저는 결혼이주여성입니다.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십여 년 전 제가 아직 아가씨 때 한국드라마가 중국에서 인기를 끌면서 저는 드마라 속의 한국생활에 매력을 느껴 한국에 가서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중개사를 통해 남편을 만났습니다.

국제결혼이고 중개업소를 통해 만나서 저희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상황에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온지 어언 십여 년,살면서 속상한 일도 화가 나는 일도 위로가 되는 일도 즐거운 일도 많았습니다. 삶의 희로애락을 한국에서 다 맛본 셈이죠.

결혼초기 저는 코리아드림을 품고 설레는 마음으로 남편을 따라 우리의 보금자리를 찾아왔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말 많이 달랐습니다. 남편은 회사원이고 월 200만 원 정도 벌고 있었으며, 집은 3500만 원의 전세에 시어머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거리의 아가씨들도 드라마 속 여배우들처럼 예쁘지 않았고 남편도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자상하지도 않았고 모든 것이 중국처럼 매우 평범했습니다. 그때 저는 정말 매우 실망해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언어도 안통하고 문화도 많이 달랐습니다. 특히 제사 드리는 것이 저에게는 제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왔을 때는 11월말이라 한국에 온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설 명절에 큰 제사상을 차려야 했습니다.

중국에서의 제사는 간단하게 과일 몇 종류만 올리고 향을 피우면 끝인데 저의 시댁에서는 손수 많은 제사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올려야 했습니다. 처음이었고 또 시어머님의 말씀도 못 알아들어 나물을 종류별로 버무려야 하는데 저는 그냥 중국식으로 모든 나물을 한꺼번에 버무려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어머님께서 다시 장을 봐서 음식을 다시 만드시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결혼에서 처음으로 지내는 제사라 시누이들도 시댁에서 일찍 명절을 보내고 친정에 왔는데 이 광경을 보고 너무나 어이없어 했습니다. 이런 저를 저도 너무 한심하게 보였고 속상했습니다.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 어이없는 실수들이 계속되자 저는 정말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곁에 친정식구가 한명도 없고 함께 상의할 사람도 없고 저를 위로해주는 사람도 없어 너무 서러운 나머지 명절이 끝나고 중국집에 가겠다고 억지를 부리며 방에 들어와 짐을 쌌습니다.

제가 옷가지며 제가 중국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다 싸는 것을 본 남편은 결국 저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당시 저는 결혼할 때 결혼중개소에 소개비로 참 많은 비용을 지불했는데 그 돈을 주면서 중국에 갔다가 마음이 바뀌면 꼭 돌아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제가 중국집에 돌아갔을 때 가족들은 제가 집에 온 이유를 듣고 심하게 나무라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압니다. 저의 남편은 참으로 착한 사람입니다. 며칠이 지나 저의 서러움도 풀리고 저는 성인인 제가 이렇게 작은 일로 남편과 이혼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한국에 오기 전에 한국어 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거리의 간판도 못 읽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아니어서 번역기를 사용할 줄도 몰랐고, 주변에 아는 친구도 없었기에 매일 매일 아파트 주변만 맴돌았습니다.

나중에는 시장에서 야채파시는 아줌마도 저를 알아볼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저의 생활이 너무 외롭고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매일 남편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렸고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 고무줄로 남편의 머리카락을 묶으면서 노는 것이 낙이였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결혼이주여성이 한국생활에 잘 적응하고 빨리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문화센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바로 저를 데리고 가서 등록하였습니다. 저는 대전 배제대에 위치한 서구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한국말과 한국문화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센터에는 저처럼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많은 외국인여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공감하고 서로 위로하면서 저는 다시 활력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그때 센터에 박소영 한국어 선생님이 계셨는데 저는 그 선생님의 수업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센터에서 공부하면서 많은 중국 친구들과 다른 나라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 공부보다 친구들과 수다 떠는 것이 더욱 재밌었습니다. 모두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지만 수업이 끝나면 함께 밥을 먹고 쇼핑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번은 제가 수업이 끝나고 베트남친구를 집에 초대했습니다. 베트남친구는 집에 컴퓨터가 없어서 저의 컴퓨터로 친정식구들과 영상통화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집에 와서 친구가 친구의 남편에게 친구네 집에 들렀다가 집에 돌아가니 걱정하지 말라는 전화를 끝내고 아직 영상통화를 하지도 못했는데 그때 마침 저의 시어머님께서 돌아오셔서 왜 집에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냐며 저의 친구를 빨리 집에 가라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났습니다. 저와 친구가 모두 외국인이라고 무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그 길로 밖을 나왔는데 어디 갈 곳도 없고 하여 밤 12시쯤 다시 집에 들어갔습니다.

시어머님도 낮에 있었던 일이 미안하셨는지 주무시지도 않고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시어머님께 야단을 친 것 같았습니다. 말도 안통하고 오갈 때가 없는 제가 한밤중까지 연락도 안 되자 남편은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많이 걱정이 되었던지 이튿날 바로 저에게 핑크색 뚜껑을 여는 새 핸드폰을 사주었습니다.

정말 제가 좋아하는 그때 당시는 최신폰 이었습니다. 지금은 핸드폰이 여러 번 바뀌어서 그 폰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 것을 쓰고 있지만 저는 첫 핸드폰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시어머님도 저에게 사과하셨고 남편도 저를 많이 걱정해주자 저는 제가 좀 심했구나 어르신들은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들이 집에 와 있는 것이 불편해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시어머님을 이해해드리지 못한 것이 조금 후회가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저의 가족은 3명이였는데 지금은 5명이 되었습니다. 두 아이가 태어난 뒤 남편 건강도 좋지 않고, 또 혼자 벌어서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려워서 저는 두 아이를 시어머님께 맡기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식당에서도 일해 보았고 건물 청소하는 일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자동차부품제조업회사에서 일했는데 저의 부주의로 손이 기계에 눌리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한동안 치료하고 다행히 치료가 잘되어서 다시 복귀했는데 예전만큼은 아니어서 동료들에게 무시도 많이 당했습니다. 한국말도 잘 안되지 저는 너무 억울하고 속상하여 퇴근버스에서 혼자 몰래 운적도 많았습니다. 비록 일이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월급날은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저는 저의 월급으로 고향에 계시는 연로하신 아버지께 생활비를 드리고 시어머님께 새 옷도 종종 사드리곤 했습니다. 시어머님은 속으론 기뻐하셨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우니 옷은 이제 그만 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시어머님께 용돈을 드리면 어머님은 또 그 돈을 또 모으셨다가 다시 손주들에게 쓰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활비로 사용하고 남은 돈으로는 저만의 비상금을 만들었습니다.

저와 남편은 생계를 위하여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지만 자녀들을 보면 항상 흐뭇합니다. 큰딸은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할머니께 효도하고 동생도 잘 챙기는 착한 딸입니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면에서 저는 남편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남편은 저보다 공부도 많이 했고 저보다 능력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육면에서 저는 이것만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중국어를 배우는 것입니다. 저는 두 아이와 어릴 때부터 중국어로 대화해서 아이들은 중국어를 잘 합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어를 잘 못합니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몸소 겪고 있지요. 그러면서 한국어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아이들을 보면 참으로 대견합니다.

처음 한국에 와서는 한국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많이 힘들어했는데 지금은 한국 아줌마가 다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은 중국에 계시는 연로하신 저의 아버지입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서 중국에 자주 찾아뵙지도 못합니다. 매번 아버지께 생활비를 보내드릴 때 남편은 항상 곁에서 좀 더 넉넉하게 보내드리라고 합니다. 이런 남편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며칠 전에 저의 부부가 다 집에 없을 때 시어머님이 중풍으로 쓰러지셨는데 다행히도 딸이 집에 있어서 쓰러진 할머니를 업고 고모님께 연락하여 고모 차에 태워 병원에 갔다고 합니다.

다행히 제때에 병원에 와서 치료를 받아 큰 위험은 없었습니다. 어제 남편이 병원이 다녀왔는데 간호사분이 그러는데 시어머님이 몰래 입원실을 나와 집에 오시려다 들켜 다시 들어갔는데 그 이유는 시어머님께서 손녀걱정에 손녀딸이 아침밥은 꼭 먹고 학교에 보내야 하니 집에 가서 아침밥을 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정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시어머님께서 며느리인 저는 별로 좋아하시는 않는 것 같지만 손녀사랑은 정말 끔찍하십니다. 몇 년간 저의 마음속에 쌓인 시어머님에 대한 원망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시어머님께서 빨리 회복하셔서 손녀딸이 시집가고 아이 낳을 때까지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비록 풍족하지는 않지만 가족들과 서로 사랑하면서 알콩달콩 사는 것이 행복합니다. 그리고 회사에 일이 없을 때 다문화센터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친구들도 만나고 유익한 정보를 주고 받고 또 노인정에 가서 노인들을 위하여 봉사활동을 하면서 우리 자녀들에게서 엄마가 열심히 살고 이웃들을 배려하고 섬기면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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