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옥수수가 하루가 다르게 커갑니다. 늠름하게 서 있는 옥수수를 보면 이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옥수수 뿌리는 참 우악스럽습니다. 저렇게 땅을 꽉 잡고 안 놓으려고 힘쓰는 모습이 마치 생이별하는 순간, 엄마 품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의 몸부림같이 보여서 측은하기까지 합니다.
옥수수는 어쩌면 생존을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옥수수에게 한 줄기 바람은 옥수수 자신을 더욱 옥죄게 합니다. 관련 연구에 의하면 이 생존 욕심이 강한 옥수수는 한 줄기 바람이 무엇인가 자기 삶을 방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죽음이 연상될 때 옥수수는 열매보다는 뿌리와 줄기, 잎새기에 더 많이 영양분을 공급합니다. 일단 바람에 꺾이지 않으려고 열매라는 생식 본능을 일시적으로 멈추고, 생존에 필수인 줄기와 뿌리에 오로지 집중합니다.
나는 옥수수밭 가운데 여기저기 난 풀을 그저 보고만 있습니다. 풀을 뽑으려다가 옥수수를 건드려 혹시나 이 흔들림을 바람으로 여겨서 불안해하고 움츠릴까 걱정이 일어납니다.
19세기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의 ‘절규’를 보면 공포스러운 죽음을 상상합니다. 뭉크는 어린 시절 불행했습니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열네 살 때 누나마저 같은 병으로 죽었습니다. 게다가 사랑하던 여인들에게 연이어 실연을 당하여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실제로 자신이 미치거나 병으로 일찍 죽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뭉크는 ‘절규’에서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무서운 비명을 토해내면서 메아리쳐 돌아오는 것을 견디지 못해 귀를 막고 있습니다.
옥수수에게도 인간에게도 마음의 평화가 중요합니다. 마음의 편안함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는 단순히 한가로운 상태가 아닙니다. 역경의 한복판에서, 전쟁의 현장에서도,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거리에서 신문을 사기 위해 판매하는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는 신문을 사며 친절하게 인사를 하고 돈을 낼 때도 마음을 다하여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신문팔이는 여전히 퉁명스런 모습입니다.
“친구, 자네는 누구에게나 항상 그렇게 공손하게 대하나?”
“물론이지. 상대가 퉁명스럽다고 나까지 그렇게 대하면 내가 지는 것이지. 내 기분을 상대 때문에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거든. 오늘을 지배하는 것은 나 자신이네.”
옥수수는 바람에 마음이 어수선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옥수수를 보면서 바람이 그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마음의 평화를 지키는 것은 자신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습니다.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이 있었습니까? 기쁨이 있는 마음속 깊은 곳을 찾으면 그 기쁨이 모든 불안과 고통을 불태울 것입니다.
그 어떤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푸르고 울창한 옥수수의 녹음이 멋져보이더니,
직접 옥수수를 길러보니 보이지않던
매발톱처럼 강인한 뿌리부터 꼭대기 꽃대까지...
어느것 하나도 눈에서 뗄수 없게됨에...
똑같은 사물을 보고도 바라보는 사물의
형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아니?
상황에 따라 보고싶은것만을
보게된다는 사실을 깨닫게되는 계기입니다.
사람은 제각기 자신만의 시야로
세상의 시야를 확정 하게되는데...
조합장님~
똑같은 옥수수일텐데,
마음의 그릇 크기 때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