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사랑방] 상처를 입고 더 밝게 달려라
상태바
[다문화 사랑방] 상처를 입고 더 밝게 달려라
  • 첸징 (중국)
  • 승인 2021.08.03 21: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전 다문화가족사랑회와 함께 하는 ‘결혼이주여성 한국생활 정착기’(88)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에서 10년을 넘게 살았던 중국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나도 모르게 한국에 온지 13년이 됐다.

13년 동안에 많은 일들을 겪어봤다. 웃은 적도 있고 울은 적도 있고 억울한 적도 있고 마음이 아픈 적도 있었다. 사는 삶은 제가 원하는 대로 달콤하지 않았지만 삶이 주는 상처를 극복하며 모든 시련을 이겨내는 든든한 저를 보았다. 철없는 젊은 엄마에서 철 든, 주름 든 강한 엄마로 다시 태어났다. 자신이 걸어온 길이 여의찮은 일도 있었지만 하소연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노력과 힘으로 빛나게 삶을 바꾸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육아, 가정일 말고 저는 직장에 다니는 일과 이 사회와 문화를 어떻게 이겨내고 또 어떻게 성장하게 되었는지 이야기 하고 싶다. 아이가 27개월 때 어린이 집으로 보내고 제 첫 번째 직장은 알바였다. 알바 하는 곳은 인삼한약가공품을 포장하는 데 였는데, 여기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다 다문화엄마들이었다. 베트남, 필리핀, 중국... 완전 작은 UN같다.

다들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데 언어, 문화, 생김새는 다르지만 우리는 조금 아는 한국말로 서로 소통하고 서로 도와주고 나쁜 감정 1도 없이 즐겁게 지내왔던 중에 우연히 중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됐다. 교육청에서 추진하는 '이중언어강사'라는 일인데. 초등학교에 가서 방과 후 중국어를 가르치는 양성교육을 받고 하는 일이다. 제 한국말 아직 서툴러서 기대반 걱정반 잘 할 수 있을까 크게 걱정이 됐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쳐주고 알게 된 것은 중국어 선생님이 서투른 한국말로 간단하게 표현해도 학생들이 중국어를 쉽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중국어를 가르쳤을 때 경험이 없어서 중국 인터넷 사이트에 중국어 가르치는 몇 분짜리 동영상을 보고 가르치면서 가르치는 방법도 연구했다.

중국어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 중국에서 언어카드를 사오고 집에서 교구도 만들고 준비를 많이 했는데도 모자라 학생들이 중국어를 배우는 흥미를 잃어버리고 지쳐가는 모습을 보았다. 더욱더 재밌고 생동감 있게 하려고 한달 한 번씩 중국어 문화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투입했다. 문화 체험 속에서 학생들이 혼자서 만두를 빚고 중국매듭을 만들고 중국과자를 먹어보고 학생들이 행복한 표정을 보니까 자기 돈을 조금만 투자해도 아깝다는 생각보다 마음이 더 기뻤다.

제 노력으로 그 나라에 문화체험을 통해 학생들이 중국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고 다문화에 대해 조금 이해하게 된 모양이다. 20대 청춘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저는 열정적으로 일을 해왔다. 어느덧 제 아이는 많이 커서 돈이 필요할 나이가 되었고 남편도 나이가 들어 앞으로의 삶에 위기감을 느껴 다른 일을 해야 했다.

중국어를 그만두고 제가 두 번째 찾은 직장은 일당을 주는 곳이었다. 그 동안 다문화엄마들이랑 어울려 같이 일을 해봤는데 이제 그 단체생활에서 벗어나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백반 집에서 일을 했을 때 어느 날에 한 할아버지가 밥을 먹고 난후 저보고 "너의 아이 커서 목욕탕에 가서 때를 미는 일을 하라고"했다. 저는 그 할아버지에게 제 아이는 대한민국의 미래이에요. 커서 이 나라를 위해 공헌해야 할 거라고 했다. 어이없고 당황스러워 무슨 이런 사람도 있냐? 인종차별인가 너무 속상했다.

식품가공점에서 한국아줌마 2명과 같이 일을 했는데 처음에는 잘해주고 얼마지난 후 점점 말이 거칠어지고 힘든 일도 많이 시키고 제가 외국사람이기 때문에 괴롭히는 건 아닐까 속도 상하고, 너무 많이 슬프고 성격도 예민해졌다. 그 후 헤매 돌아다니다가 한 자동차부품회사에 7일정도 일을 할 때도 참 힘들었다.

일하던 팀이 바꿔서 한 중국아가씨랑 같은 팀으로 조합되고 일을 잘 모르는 게 있어서 물어봐도 잘 가르쳐주지 않고 일을 제대로 못할 것 같은 생각 때문에 감정적으로 열을 받았다. 2교대라 12시간 동안 힘들게 했는데 결국 한 사람 때문에 관리자가 물어보지도 않고 저를 잘랐다.

회사 통근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중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너무 억울하고 답답하고 사회생활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했다. 30대 된 나이에 혼자서 이 사회랑 직면하면서 문화랑 충돌하고 또 사람이랑 부딪치고 많은 스트레스와 상처를 받고 너무나 힘들었다. 사는 삶이 아무리 힘들고 뜻대로 안 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후 저는 고용지원센터에서 취업성공패키지 교육을 통해 다시 출발했다.

고용지원센터 선생님의 추천으로 안경렌즈회사 면접을 봤다. 여기가 제 세 번째 직장은 회사였다. 면접을 보는 사람들이 다 한국 사람인데 저만 유일한 외국사람 이었다. 수많은 경쟁자를 뚫고 취업이 되어서 다음날부터 출근했다. 여기서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을 만났다. 제 선생님이자, 은인인 이 회사 이사님이었다.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 이사님이 저를 보고 그 전에 무슨 일을 해봤냐고 물어보셨다. 알바와 일당을 피하고 5년 동안 중국어만 가르치는 일을 했다고 말씀을 드렸다. 회사에 몇 달 다니다보니까 직장을 자주 바꾸면 좋은 일이 아니구나! 회사에서는 이 사람은 끈기가 부족하고 인간관계가 문제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다른 회사에 들어가려해도 잘 안 받아주는 편이에요. 알바, 일당보다는 회사를 다니는 것이 더 안정적이다.

일을 하다가 다른 사람과 부딪칠 때도 있고 서로 성격도 안 맞으면 분통을 터질 수밖에 없다. 신경이 거슬려서 직장을 오래 못 버티는 사실. 다른 직장을 옮겨도 또 문제가 생기고 또 직장 구해야 하고 그래서 그냥 참자. 참다 참다 보니까 못 참겠다는 생각을 갖고 근무하는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이사님이 제 성격이 어떤지 감정 어떤지 잘 파악한 것 같다. 영화 <<happy day, death day>>속 여주인공처럼 나쁜 것 때문에 감정을 폭발하고 회복하고 같은 일을 또 당하면 폭발하다가 회복한다는 제 성격에 단점을 발견했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감정 통제를 잘 못하는 것이다.

수없이 반복된 감정 훈련과정에서 버티고 또 버티고 진짜 죽을 맛이었다. 이사님이 저를 도와주기 위해 좋은 말이나 설교도 해주시고 현실 속에서 다른 사람과 부딪치면서 깨달음을 얻어야 나쁜 감정의 뿌리를 뽑을 수 있다고 하시며 이사님이 제 잘 못된 행동도 예쁘게 봐주시고 많은 시간으로 제 나쁜 버릇을 고쳐주고 기다려주신 것에 너무 감사하고 고마웠다. 어느덧 40대가 되니 예전처럼 나쁜 일에 빠지고 속상하고 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모든 게 이사님 덕분에 강한 엄마로 성장됐다.

매일 "0"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상처를 입어도 밝게 웃으며 어떤 어려운 난관이 오더라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상처를 입고 더 밝게 달려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아토피를 이기는 면역밥상
우리 단체를 소개합니다
임영호의 조합장 일기
가문의 뿌리
풍경소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