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씨는 신창 단일본이며 시조는 송나라때 후주의 이부상서 표대박으로, 절의를 지켜 고려로 망명 귀화하여 온창현 신창현에서 정주하게 되었다(고려 광종11년).
250년 뒤 중시조 표인여 해관지후합문지후 평장사는 고려말 충숙왕때 좌리공신으로 온창백으로 오게되어 표씨들이 사실상 시조로 모시며 신창을 본관으로 삼은 효시다.
표씨는 조선조에 10여 명의 문과급제를 배출하여 5세손 표계는 세종때 양덕현감과 상주 유학교수관을 지냈으며 별세 후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위로 표연원은 석성현감, 표연한은 병마절도위 성천부사를 지내고, 표연말은 홍문관제학 겸 예문관제학을 연산군때 대사성과 승지원 우승지와 가선대 부 이조참판 겸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후일 중종 제문을 직접 지어 추모장례를 치르게 하고 상주군함창의 임호서원을 건립하고, 함양군의 구천서원, 의령의 숭보사에 배향되고 이조판서를 가증하였다.
표연말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준은 사헌부 감찰, 차남 표빙은 중종조에 홍문관 직제학 도승지, 셋째 중은 능참봉 부사를 지내는 등 3대가 문과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냈다.
또 전라도사를 거쳐 울산부사를 지내고 우의정과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된 표빈은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상을 받았으며 울산에 선정비가 세워져 있고, 그의 아들 표헌은 선조때 어전통사로 명나라 사신을 통역과 재치로 왕이 곤경을 면케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조선에 남을 것을 계청한 공으로 선무원종 1등공신에 추훈되었다.
표정노 지중추부사 대호군은 광해군 때 선친에 못지 않은 명역관으로 원접사에 역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시로 오만방자한 태도를 공손케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