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호의 조합장 일기] 가을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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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의 조합장 일기] 가을의 단상
  • 임영호 동대전농협 조합장
  • 승인 2021.10.05 13:5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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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농사와 달리 밭농사는 힘이 듭니다. 여러 농작물을 계절에 따라 심고 수확하며 4계절을 보내야 합니다. 3월에 농부의 꿈은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제 그 밭에는 무와 배추만 남아있습니다. 금년의 마지막 농사입니다. 된서리가 오기 전에 유치원 꼬마들의 무를 뽑는 들뜬 목소리가 들판을 가득 채울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과 농작물을 생각하면 기쁨보다 실망이 더 큰 것이 사실입니다. 심었을 때 기대보다 실하지 않은 수확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기쁨보다 곤란이 많은 우리네 삶처럼 무겁고 힘든 과정이었지만, 가끔 찾아오는 소소한 행복이 농사를 지을 만하게 합니다.

로마의 전성기 황제이면서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명상록》에서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면서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깁니다.
 

오, 인간이여! 너는 이 위대한 도시에서 시민으로 살았다. 그 삶이 오 년이든 오십 년이든 무슨 상관이 있는가? 네가 그 도시에서 퇴장하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는가? 너를 도시에서 퇴장시킨 것은 독재자나 부패한 판사가 아니다. 그것은 너를 이 세상으로 들여놓은 똑같은 자연이다. 그것은 감독이 희극배우를 고용했다가 더이상 무대 위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해고하는 것과 같다.

“저는 5막이 아니라 이제 겨우 3막을 연기했습니다.”

네 말이 옳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3막이 전체 연극이다. 왜냐하면 언제 끝날지를 결정하는 것은 처음에는 너의 구성에, 지금은 너의 해체에 책임이 있는 자의 몫이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쪽에도 권한도 책임도 없다. 이제 평안히 떠나라. 너를 해고하는 자도 평안을 품고 있다.
 

아우렐리우스는 58세의 나이로 로마제국의 최전선에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는 인생이 5막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3막으로 끝나는 허무한 연극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이 올 때처럼 세상을 떠날 때도 감독의 의도대로 내려와야 합니다.

농작물도 자기들 일생이 있습니다. 밭이란 세상 속에는 많은 농작물이 왔다가 사라집니다. 계절에 맞추어 심고 거두어들입니다. 누구도 거역을 못합니다. 언뜻 보면 제가 감독이고 농작물이 연기자처럼 보이나 실은 보이지 않은 신(神)이 감독입니다. “아직은 더 살고 싶습니다” 라고 읍소를 해도 나는 권한이 없고 책임도 없습니다.

서양화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그림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의 《만종》입니다. 어릴 적 이발소에 가면 어김없이 걸려있습니다. 해질 무렵 멀리 보이는 교회 종소리에 감자를 캐던 손을 멈추고 두손을 모아 기도를 드립니다.

수레의 자루 속에는 수확량이 많지 않습니다. 수확이 끝난 감자밭에서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감자 이삭을 줍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한 댓가가 보잘 것 없는 가난한 농부이지만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습은 평화스럽고 경건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빈곤을 누구에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신에게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자연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진화하는 과정입니다. 가을에 열매가 풍성하게 맺혔다고 기뻐하면 그 기쁨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우리는 감독의 지시에 따라 연기하는 배우입니다. 오늘이 내가 심은 농작물처럼 계절이 끝나는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까 생각해 봅니다. 수많은 이기심으로 무질서하게 뭉쳐있는 존재인 내가 《만종》의 부부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 기도를 올리며 신에 대한 경외심으로 퇴장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자꾸 듭니다.

임영호 동대전농협 조합장
임영호 동대전농협 조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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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신호 2021-10-06 08:13:41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자연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진화하는 과정]]

딱....
제 마음을 함축하여 표현 해주신듯 합니다.
서툰 왕초보 농부라서 갈길이 멀고도
험난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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