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스팔트가
막 녹아 내리던 염천에
딱 삼일 남짓을
예향 전주에서
긴히 머물 일이 생겨
팔자에도 없는
호화스런 오성급호텔에서
진관스님 모시고
숙박을 다해 보았다
치문(緇門, 승가)에 든 지도
어언 반백 년쯤 오래여서
빛바랜 회색승복이나
걸쳐야 마땅하건만
어제 머리 깎은 햇 중마냥
늘 천진난만하여
짙게 물들인 검은색 승복에
사계절 빛이 좀 바랜 오렌지색
가사를 걸치시고
길에서 만난
어느 여인
어느 누가
손바늘로 짜준
오렌지 빛깔 빵떡 모자를
한여름에도 눌러 쓰시고는
오늘도 수송동 저잣거리
노방에서 헤메시는
오렌지파 우리 흑진관 스님과
전주 객관을 거닐때
소유의 덧없음을
몇마디 나누었다네
유생들의 소의경전인
명심보감 ‘성심’ 하편에
“천 칸짜리 고대광실이라도
밤에 누울 자리는
여덟 자면 충분하고
기름진 밭이 만경이라도
하루에 먹는 쌀은 두 되면
충분하다”고 했던가
大廈千間
夜臥八尺
良田萬頃
日食二升”
죽음길 병풍 뒤에서
향 냄새를 맡으며
저승길 떠날 때에
단 한 푼도 가지고
가지 못할 재물
살아 있을 때 누울 자리
여덟 자의 공간이
있으면 족하고
하루 먹는 쌀 두 되면
충분한데도
꼭 천년 만년을 살듯
그렇게 쌓아 놓은 재물
누대에 걸쳐 전해질 수 없으며
남은 재물일랑 요긴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베풀며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삶을 사는
현명한 방법이리라
진관스님 가라사대
“우리 어릴 적에는
사는 게 너무 어려워
전주로 유학을 오기가
지금 미국 유학보다도
힘들었다오”
늘 김제 만경 벌판 황금들녘
지긋한 눈길로 어루 보듬어
미륵의 정기를 언제나
그리워 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났기에
아니, 만약 더 혹독한 시절
좀 더 예전에
이 세상에 왔다면
강증산과 함께
가가호호 호남평야를 누비며
죽창 든 농민군 앞잽이나
신흥종교 교주쯤은
너끈히 해 자셨을 텐데
어느 날 화창하고
주머니에 돈 좀 있는 날이 오면
서울역에서 진관스님 모시고
전주행 나들이나 함 해야겠다
수란 한 알 톡 털어 넣은
전주 콩나물국밥에
계피향 좋을시고
알콜도수 1%도 안 되는
모주 한잔을 걸치고
호사스런 전주 나들이
이거이 생각만 하여도
신명이 절로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