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사랑방] 좋은 날이 꼭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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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사랑방] 좋은 날이 꼭 온다!
  • 리징리앙(중국)
  • 승인 2022.04.1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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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다문화가족사랑회와 함께 하는 ‘결혼이주여성 한국생활 정착기’(123)

저는 1982년 중국 심양에서 태어났습니다. 배려가 많으신 부모님 밑에서 외동딸로 밝게 자라난 탓에 늘 주변에는 축복만이 넘쳤습니다.

하지만 점점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저는 대학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저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이 악물고 노력하여 ‘동부재정대학교’의 야간 과정에 합격해서 마침내 대학 졸업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007년, 한 친구의 소개로 지금의 전남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외모가 준수하고 큰 키의 전남편은 성격마저도 아빠처럼 잘 배려해 주는 듯해서 호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연애를 하던 중 중국 심양에서 결혼을 하여 신혼살림을 시작한 저는 장밋빛 인생만 남았다며 기쁨의 눈물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기쁨의 눈물이 피눈물이 되고, 신혼의 웃음소리가 탄식소리로 바뀌는 데는 채 2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사업을 해 보겠다고 전남편은 중국을 떠나기로 결심을 했고 저는 아내로서 어떠한 결정에도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가부장제’라는 한국만의 독특하고도 나쁜 남성중심의 문화라는 것을 한국에 와서야 알았습니다.

저희 고향 중국은 산아제한 이후에 한 자녀 낳기 운동 이후, 딸이든 아들이든 다 한명이라서 가정에서는 소중한 자식으로 여겨졌었습니다. 문화가 다른 한국에서의 생활은 가뜩이나 겁이 많던 저를 주눅 들게 했고, 언어의 장벽에 가로 막혀 거의 매일 집에만 있게 되었습니다.

전남편은 연애할 때와는 달리 가정에 점점 소홀해져 갔고 급기야 주식에까지 손을 대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저는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탓에 모든 것을 그에게 믿고 의지했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한국의 시아버님이 건강이 악화되어 쓰러지는 일까지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전남편과는 달리 살갑게 절 맞아 주시던 시아버님인지라 저는 정성껏 간호하였습니다. 시댁이 저희 집에서 가까운 거리라 저는 직장을 다니는 와중에서도 시아버님 밥 짓는 일과 집안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말이 안 통하고 간병의 지식이 없어서인지 좀처럼 시중들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전 결심했습니다. 아무도 믿지 말고 나 자신만 믿자. 주변의 환경을 탓하느니 내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자. 상황을 바꿀 수는 없으니 내 태도를 바꾸어 보자는 마음으로 삶을 개척해 가기로 했습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소주병을 옆에 둔 채 눈이 시뻘겋게 주식 상황판을 쳐다보는 전남편을 뒤로하고, 저는 햇살 가득한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그 전에는 햇살마저도 마치 칼날처럼 제 몸을 찌르는 듯 했는데 새로운 결심을 하고 햇살을 온 몸에 받으니 마치 과자 부스러기 쪼개지듯 바스락거리며 햇살이 따뜻하게 부서졌습니다.

그 길로 바로 다문화 센터를 방문하여 한국어 배우기에 온 힘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2014년 2월에 한국어 능력시험 4급에 붙게 되었습니다. 언어의 장벽을 깨고 나니 세상이 다 푸른 빛으로 물들었습니다. 간판도 보이고 음식점의 메뉴도 보이고, 하나뿐인 아들에게 당당한 엄마로서의 모습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아들은 우리 엄마가 2개 국어를 하는 천재 엄마라며 엄지손가락을 척 올리기도 했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리던 한국에서의 생활이 미소가 지어지고, 심장이 두근대는 한국에서의 생활이 온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이 질투를 한 것일까요?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전남편의 투기에 가까운 주식 투자로 집도, 돈도, 모든 걸 잃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빚도 자산이라면서 남편은 대출을 받기 위해 제 명의까지도 손을 대려고 했습니다.

저는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지난 과거는 힘들었다 해도 시간 가면 추억이 된다고 하는데, 빚만 늘어 갈 미래는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아이의 미래였습니다. 철 들면서 아빠의 모습이라고는 주식판만 보는 것이어서 아이의 가족에 대한 신뢰가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 인생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지만 소중한 자식의 앞길을 막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냈습니다. 힘들지만 어렵지만 이것이 바른 길이라 생각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전남편과 이혼을 했습니다.

그도 잘못이 큰 것을 아는 지 순순히 합의를 해 주었습니다. 이혼 법정을 나오는 날, 그 날의 햇살은 다시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제 심장을 도려내는 듯 했습니다.

전 이제 초등학생 아이를 데리고 살아야 하는 이혼녀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불편한 시선과, 외국인에 대한 편견, 여자로 느껴야 하는 차별, 이 모든 것이 밤이면 한꺼번에 밀물처럼 텅 빈 방 안으로 밀려 왔습니다. 너무 많이 울어 말라버린 눈물샘과 터져 버린 입술.... 저녁이면 저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울었고, 중국에 계신 엄마를 애타게 불렀습니다.

지나온 모든 삶이 잿빛으로 물들어가고 살아갈 제 인생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점점 삶이 황폐해져 가던 어느 날 밤, 붉게 충혈된 제 눈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자고 있는 아이가 들어 왔습니다. ‘저 아이의 미래를 위해 이혼까지 결심했는데, 지금의 나는 저 아이에게 무슨 미래를 안겨줄 수 있는가’ 라는 생각에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집안을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그리고 시아버님 때의 간병 경험을 잘 떠올려서 일자리를 찾아보자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정성과 사랑이 가득한 간병은 몸만 아니라 마음도 치유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저는 간호조무사 자격증도 무사히 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다 보니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취득하게 되었고 지금의 강남한방병원에 취업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난의 과정을 겪으면서 한국에서의 정착과정이 저처럼 쉽지 않은 사람도 많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봉사활동도 나가게 되었습니다.

대전 둔산동에 있는 이상플러스 학원이라는 곳에서 학생들의 심리상담을 무료로 해 주다 보니 ‘봉사’라는 것이 남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깨닫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타인에게 베푸는 것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원래 우리 모두의 것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봄날의 햇살을 칼날로도, 부서지는 과자로도 보지 않습니다. 저 쏟아지는 봄날의 햇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햇살을 받아들이는 내가 행복하냐의 문제임을 이제는 압니다.

지금도 비록 어렵고 힘들지만,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내 자신의 행복감을 충만히 가지고 있는 저 자신이 고맙습니다. 믿음직스럽습니다.

행여 지난 날의 저처럼 고통을 받는 이주여성들이 있다면 꼭 이런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상황을 바꿀 수 없을 땐 내 마음가짐을 바꾸라’고, 그리고 그런 날을 버티고 이기면 좋은 날은 꼭 온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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