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뿌리] 문통집 언문지 남긴 '진주류씨'

2022-06-09     조연경 기자

류씨 성의 기록이 처음 보이기 시작한 것은 후삼국 시대 말 고려 개국전후이다. 시조는 고려 개국 삼한공신 대승공 류차달이다. 문간공 공권, 상서공 언침, 밀직사 순으로 이어졌으며 십세(十世)에 판시사 진산군 인비께서 이봉 득관해 진주류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손자 익양공 혜방과 안간공 혜손 이후에 자손이 크게 현달하고 번창하여 이판공파, 북부령공파, 시윤공파, 안간공파로 대별되며, 충효전가 청백유업을 계속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제학 2인, 청백리 4인, 상신 2인, 공신녹권 8인, 증시 17인, 등단장신 4인, 병마절도사 30인, 삼도수군통제사 10인, 수군절도사 27인, 목사부사 86인, 문과급제 80인, 무과급제 380인이며 육조판서와 삼사의 대간, 승지, 지방 목민관, 원종공신 등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국난이 있을 때 마다 진충보국의 공신 충신열사가 나왔으며 윤리기강이 해이 할 때마다 효자 열녀가 이어져 내려와 정려를 받은 분 또한 많으며, 문장서화에 진동 혁연이 있으며 삼대묵죽주가에 오른 덕장과 문통집 언문지를 남긴 희(僖) 등이 드러난 분이다.

유림으로부터 도덕군자로 추앙받는 학자로서 경국제세를 논하고 학문에 전념한 은일과 명현 또한 많으니 문강 무습하여 잠영진신 무반벌족이 끊이지 않아 오늘날에도 입법 사법 행정부와 경제계 문화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서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기라성 같은 후손이 많다.

추원보본에 뜻을 두어 선대유업의 현양 사업과 활기찬 미래 창조의 후학 인재 육성에 뜻을 가지고 진산 장학회를 결성하여 1년에 200명의 대학생에 장학금을 수여하며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동량을 키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