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뿌리]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거족 '영양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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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뿌리]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거족 '영양 김씨'
  • 양민규 기자
  • 승인 2024.03.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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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김씨의 상징탑으로서 조선의 가장 큰 정문의 역할과 동시에 화기를 막고자 세워진 승례문의 형태를형상화 하였다. 이것은 영양김씨의 무궁한 발전과 후손들의 광명과 보은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자 하였다.또한 문의 양쪽에 힘차게 솟아오르는 두 마리의 용은 성자는 비록 달리하나,그 시조는 같은 영의공의 후손인 김, 남, 양씨를 상징하며 두 마리의 승천하는 용은 두 성자를 하나로화합, 단결하여 포용하길 바라는 마음과 후손들의 무궁한 번영과 성장을 도모하고 영원한 미래를 지향할 수있도록 용이라는 영적인 동물을 통하여 시각적효과를 부각시켜 제작하였다.
영양김씨의 상징탑으로서 조선의 가장 큰 정문의 역할과 동시에 화기를 막고자 세워진 승례문의 형태를 형상화하였다. 이것은 영양김씨의 무궁한 발전과 후손들의 광명과 보은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자 하였다. 또한 문의 양쪽에 힘차게 솟아오르는 두 마리의 용은 성자는 비록 달리하나, 그 시조는 같은 영의공의 후손인 김, 남, 양씨를 상징하며 두 마리의 승천하는 용은 두 성자를 하나로 화합, 단결하여 포용하길 바라는 마음과 후손들의 무궁한 번영과 성장을 도모하고 영원한 미래를 지향할 수있도록 용이라는 영적인 동물을 통하여 시각적 효과를 부각시켜 제작하였다.

영양김씨의 시조 김충(金忠)은 당나라 봉양부 여남 사람으로 벼슬은 이부상서에 이르렀다.

신라 경덕왕 14년(755년) 안렴사(按廉使)로 장자 석중(錫中)과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환하던 중 동해상에서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영덕군 축산면 해변에 표박하였다. 경덕왕이 이 사실을 당에 알리니 당 현종은 ‘부자의 생존은 하늘이 도운 것’이니 본인이 원하는 곳에서 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들 부자가 신라에서 살기로 결정하니 이에 경덕왕은 이들이 여남에서 왔다하여 남씨(南氏)로 사성(賜姓)하고 이름도 민(敏)으로 개명하여 영양을 식읍지로 하사하고 영의(英毅)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때 맏아들 복야(僕射) 석중(錫中)은 본래의 성 김씨를 그대로 받아 새로 자리잡은 영양 고을 지명을 따라 본관을 영양으로 하였다. 영양김씨와 남씨 두성은 비록 성은 다르나 시조는 같은 영의공이다.

고려조에 첨의참리(僉議參理)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충황(忠晃)을 기일세(起一世)로 세계(世系)하여 후손들은 영양을 중심으로 세거하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거족으로 자리 잡아 왔다. 율곡선생에게 훌륭한 어머니 신사임당이 있었다면 퇴계 선생에게는 훌륭한 할머니 정부인 영양 김씨가 있었다. 퇴계 선생이 생후 7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의게 되자 할머니는 어린 퇴계를 자애로 기르면서 항상 학문에 힘쓰며 바르게 살아가도록 가정 교육을 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퇴계가 직접 지은 할머니 묘갈명에 잘 나타나 있으며 위대한 학자 퇴계를 길러 낸 할머니가 바로 영양김씨 11세손 부사직 유용(有庸)의 딸이다.

영양김씨는 유구한 세월 동안 조상의 덕업을 기리면서 인륜대도를 꿋꿋이 지켜온 문중으로 앞으로도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또한 영양김씨는 1998년부터 인터넷족보(http://yeongyangkim.com)를 국내외적으로 최초로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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