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뿌리] 국난 극복 앞장선 충절의 가문 '경주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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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뿌리] 국난 극복 앞장선 충절의 가문 '경주이씨'
  • 이지수 기자
  • 승인 2020.12.0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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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始祖)가 박바위에 내려옴을 상징하고 문중의 번영(繁榮)과 화합단결(和合團結)을 뜻하며 역사적(歷史的)인물 배출(輩出)과 앞으로 역사에 남을 인물을 상징 조형함.
시조가 박바위에 내려옴을 상징하고 문중의 번영과 화합단결을 뜻하며 역사적인물 배출과 앞으로 역사에 남을 인물을 상징 조형함.

경주이씨 시조는 이알평(李謁坪)이고 기원전117년 하늘에서 박바위에 내리어 알천양산 촌장으로 6촌장과 더불어 처음으로 화백회의를 주도했다. 그는 알에서 깨어난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4년간 섭장한 신라 건국의 원훈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유리왕 9년에 이씨(李氏)로 사성받았고 법흥왕 23년에는 충헌공으로 시호를 받았으며, 무열왕 3년에는 은열왕에 추봉 되었다. 뒤를 이어 신라말에 진골로 소판 벼슬을 지낸 소판공 이거명(李居明)에 이르러 비로소 선대의 계대를 정립하였으니 이 어른이 중시조다.

경주이씨는 사성의 으뜸종문으로서 뒤에 우계, 차성, 합천, 평창, 아산, 재령, 원주, 이씨로 분적되었다. 소판공 이후 경주이씨는 천자만손으로 번창하여 조선조에만 8명의 정승과 3명의 대제학, 178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한 대표적인 명문거족이다. 고려말에 익재 이제현선생은 대학자이자 문장가로 원도당이 정동성을 설치하여 우리나라를 병탐코저 망동할 때 공은 정치는 그 나라에 맡기고 백성은 그 나라 백성은 그 나라 백성끼리 살게 해야 된다는 국기국인기인(國基國人其人) 중용과 구경에서 도출한 여섯자 글자를 인용하여 준절히 변박하여 원도당에 망동을 조용히 잠재운 구국의 영웅이며, 석탄 이존오는 신돈을 규탄하고 절의와 충성을 지켰다.

조선조 중엽 8문장으로 꼽히는 이공린의 여닯아들 팔별이 있고, 임진왜란시 황해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사류재 이정암, 지퇴당이 정형 여덟 형제 팔정이 있으며, 오성과 한음이 일화로 유명한 오성부원군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의 국난을 극복한 조선조 4대 명재상으로 청백리에 올랐으며, 은암 이수일은 해전의 충무공 이순신과 비견되는 육전의 충무공이었고, 정익공 이완 대장은 효종을 도와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벽오 이시발은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고 이 괄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화곡 이 경억은 애민선정으로 칭송을 받은 정승이다. 초려 이유태는 향약(鄕約)으로 치국·경제개혁에 앞장선 대학자이었고, 오천이 종성은 영조때 탕평책 수립에 공이 컸다.

조선후기 이벽은 천주교를 처음 선교한 성조였으며 한말 성재 이시영은 회영등 6형제가 함께 만주에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후 귀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바 있다. 보재 이상설은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워 교포들의 교육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정사로 대한광복군 정부의 정통령이었으며, 상화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한 민족시인이었으며, 호암 이병철은 한국경제발전의 상징인 삼성의 신화를 이룬 재계의 거목이다.

이렇듯 경주이씨는 나라가 위난을 당할 때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지킨 충절의 가문이며, 이알평 시조는 오늘의 민주정치를 제창하신 분으로 후세 만인의 본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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