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뿌리] 조선왕조 왕비 4명 배출 '여흥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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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뿌리] 조선왕조 왕비 4명 배출 '여흥민씨'
  • 이지수 기자
  • 승인 2021.03.0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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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형의 門자 모양은 성(姓)자를 표현한 것으며 중앙부위의 竹筍(죽순) 및 文자 모양과 좌대의 서책모양은 先祖들의 崇尙(숭상)하시었던 학문과 행실, 충절과 신의 를 교육의 指標(지표)로 삼은 四敎의 뜻을 표현한 것이다.
외형의 門자 모양은 성(姓)자를 표현한 것으며 중앙부위의 죽순 및 文자 모양과 좌대의 서책모양은 선조들이 숭상했던 학문과 행실, 충절과 신의 를 교육의 지표로 삼은 四敎의 뜻을 표현한 것이다.

여흥민씨의 본관 여흥은 현재의 경기도 여주의 옛 이름이며 여흥단본으로 통하고 있다. 시조는 고려때 상의봉어를 지낸 휘 칭도이며, 여흥민씨는 조선왕조 때 네 분의 왕비를 배출하였으니 즉 태종비 원경왕후, 숙종비 인현왕후, 고종황제비 명성황후, 순종황제비 순명황후 등이다.

원경왕후는 성군 세종대왕의 어머니며, 인현왕후는 예의 바르고 정숙하신 분이며, 명성황후는 기울어 가는 왕조와 나라를 위하여 노심초사 정성을 다했다.

고려조가 망하자 절개를 지켰던 두문동 가운데 민씨로는 안부 농은공, 보문 소윤공, 유 여흥군 세 명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여운, 인로 등 의병장들과 호성공신 희건, 여원군을 위시하여 많은 민문종족이 용감하게 왜적과 싸웠으며, 병자호란 때는 충민공과 그의 아들 3형제등 가족13명이 모두 순절하였으며 경상 우병사 충장공도 순절하였다.

한말인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영환 충정공은 백관을 이끌고 궁궐에 연좌하여 조약의 파기를 상소하였으나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자 국민에 고하는 애절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뒤에 그 혈의를 두었던 곳에 푸른 대나무 몇 줄기가 마루의 틈새로 돋아나와 푸르고 늠름한 모양을 띠었으니 그것을 혈죽이라고 한다.

한말과 왜정시대를 거치면서 충정공 이외에도 긍호, 종식 등 의병장들과 치도, 필호 등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바쳐서 왜병과 싸워 전사하거나 옥사하였으며 혹은 만주벌판과 중국광야에 서 풍찬노숙 하면서 일편 단심 겨레의 생존과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투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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