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의 그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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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의 그 약속
  • 탄탄(불교 중앙 박물관장, 적조사 주지)
  • 승인 2021.12.03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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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특별하게 볼 일이 있거나
만나야 할 그 누군가가 있지는 않아
연말연시면
어지간히 뻔질나게 종로와 광화문을 배회했다

첫눈이 오면
만나자는 약속을 하는
멋스러움 하고는
거리가 있었지만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종로서적이나 교보에서
시집이나 에세이를 사들고
대만인이 운영하는 청요리집에서
짜장 한그릇을 비우거나
분식집에서 떡라면 훌훌 때우고는
아득히 아주 멀게만 느껴져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1호선 전철을 타고
어둠을 벗 삼아
불꺼진 집으로 스며들었다

시내를 누비며
거리를 지나는 인간 군상을 연구했고
누구와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지도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드물게 약속을 한 사실만은
희미하게 남아 있던 지난날

YMCA 앞에서
그 누구와 만났고
막걸리와 순대를 안주하여
시국을 논하기도 하던 33년 전쯤
신학기가 되면
고액의 학비가 걱정되던
그 겨울에서 봄은 참 멀리도 흘러왔지만
첫눈의 그 약속은
쉰을 한참 넘기고
가슴 뭉클했던 생의 열정
이제 식어가지만
내 가슴 한쪽에 아직은
타다 남은 잔불처럼 웅크리고 있으니
누군가 호호 불면
다시 살아날 불씨처럼
다시 활활 불타오를 것만 같기도 하다

그 겨울의 설레던 첫눈이여
마음 들뜨게 했던
낭만의 계절이여
입동은 겨울의 시작이라지
눈 내리는 추위의 시작은 소설
작은 봄처럼 날이 따스해 소춘(小春)이라는데
입동도 지나 소설에도
기다리던 눈은 쌓이지 않고
곧 소춘이 올 텐데

인생처럼 계절도
입동과 소설을 만나서
닮은 듯 힘겨워라
소춘이 어서 와야
내 인생도
얼음물이 녹아서
계곡에서 졸졸거리며 흐르듯 풀리려나

유수처럼
수십 년도
눈 깜짝할 사이 빠르게도 흘렀다
몸살 난 어저께
그날 아침의
내 몸처럼
파르르 움츠려 떨리고
천근만근 무겁다

언제나 고독한 아침이면
저절로 눈이 떠지고
날마다 날카로운
생의 모서리에 서서
힘겹게 마주하는
늘 위태로웠던 일상
삶과 죽음이 늘 공존하는 경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마음은 꽁꽁 얼어붙어
애달픈 삶의 편린들
이제 지난 세월을 추억하는 것조차 힘겹다

점점 얼음덩어리가 되어가는 마음 한구석
사르르 녹여줄 난로 같은 사람이나 있었으면
저녁나절엔
그와 따끈한 술 한잔을 뎁혀
어묵 안주에
술이나 한잔 하였으면

탄탄(불교 중앙 박물관장, 적조사 주지)
탄탄(불교 중앙 박물관장, 적조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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