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뿌리] 성리학 전파에 큰 공을 세운 '남포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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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뿌리] 성리학 전파에 큰 공을 세운 '남포백씨'
  • 조연경 기자
  • 승인 2022.09.01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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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으로의 출발 출발했던 지점으로의 귀향은 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작품의 기본적인 형태는 門의 모습으로 하고 남포백씨의 白자를 형상화 한다. 문주의 붉은 돌과 남포백씨 역사비와 스테인레스 연결고리는 새로운 출발과 귀향의 시점인 문에서부터 붉은 태양처럼 밝게 빛나고 길이 번성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남포백씨의 시조는 신라 헌안왕 (857-860)때, 벼슬이 삼중대광 좌간의대부를 지내고 시호가 익렬인 백중학이며, 그는 뜻한 바 있어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돌아와 후배 양성으로 일생을 마치며 남포현 일역에 학문의 길을 처음으로 정착시킨 인물이다. 그리고 남포백씨의 현조로 숭상을 받는 연정 백광원은 신라 경문왕(861-875)때 벼슬이 광록대부 문하시중 정당문 평장사를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나서 중국까지 명성이 높았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비문을 지었으며 묘소는 남포현 양각산 서쪽 동막동에 후손 백이정의 묘와 상하로 한 곳에 현존하고 있다. 이로서 남포백씨는 남포현에 뿌리를 내린 후 1천 2백년 가까이 번창해 온 성씨이다.

남포현은 현재의 충청남도 보령시의 남부지역 즉 남포면, 웅천읍, 주산면, 성주면 미산면을 포함한 지역인데 그 면적으로 보아 보령시의 절반을 차지한다. 고려사열전과 조선시대의 역사서 동국여지승람 남포현 인물편에 백중학 그 후손으로는 고려시대의 국학대사성 백문절 그분의 아들 상당군 백이정은 남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이 고장에서 살아온 백씨들은 남포를 본관으로 함을 자랑으로 삼는다.

남포백씨의 중시조는 고려시대 고종 원종 충렬왕 등 3대에 걸쳐 왕을 섬기며 강직한 충신으로 알려진 담암 백문절로 시호는 문간이다. 백문절은 고려 고종때 과거에 급제하여 왕의 교지나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관청인 한림원에 들어간 후 한림원의 최고위직 중서사인이 되었다. 그 후에 이부시랑과 국자제주라는 관직을 역임했다. 1269년 폐위되었던 원종이 복위하여 중국의 원나라에 들어갈 때, 외교문서인 표문을 백문절로 하여금 짓게 했는데, 원종이 폐위사실을 숨기고자 함에 붓을 놓고 통곡하며 호소한 끝에 사실대로 기록했다고 한다. 그 후 고려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의 국학대사성·왕족직속관청 책임자인 보문각학사가 되었다.

백문절의 아들인 백이정은 고려 때의 성리학자이다. 호 이재 시호 문헌으로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충선왕을 따라 연경에 가서 10여년간 머무르며 주자학을 연구 통달하고 돌아와 이제현,박충좌 등 제자를 가르킴으로써 우리나라 성리학을 전파 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충선왕 때 상의회의 도감사가 되었고 뒤에 상당군에 봉해졌다. 

남포백씨는 신라 헌안왕 때 현단위로는 백씨 중에서 최초로 관직에 오른 백중학을 시조로 역사적 사실이 명확하며 1천 2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자부심을 갖고 남포관향을 지키면서 충신 공신 유학자 등 역사적으로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하여 나라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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