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백씨의 시조는 신라 헌안왕 (857-860)때, 벼슬이 삼중대광 좌간의대부를 지내고 시호가 익렬인 백중학이며, 그는 뜻한 바 있어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돌아와 후배 양성으로 일생을 마치며 남포현 일역에 학문의 길을 처음으로 정착시킨 인물이다. 그리고 남포백씨의 현조로 숭상을 받는 연정 백광원은 신라 경문왕(861-875)때 벼슬이 광록대부 문하시중 정당문 평장사를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나서 중국까지 명성이 높았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비문을 지었으며 묘소는 남포현 양각산 서쪽 동막동에 후손 백이정의 묘와 상하로 한 곳에 현존하고 있다. 이로서 남포백씨는 남포현에 뿌리를 내린 후 1천 2백년 가까이 번창해 온 성씨이다.
남포현은 현재의 충청남도 보령시의 남부지역 즉 남포면, 웅천읍, 주산면, 성주면 미산면을 포함한 지역인데 그 면적으로 보아 보령시의 절반을 차지한다. 고려사열전과 조선시대의 역사서 동국여지승람 남포현 인물편에 백중학 그 후손으로는 고려시대의 국학대사성 백문절 그분의 아들 상당군 백이정은 남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이 고장에서 살아온 백씨들은 남포를 본관으로 함을 자랑으로 삼는다.
남포백씨의 중시조는 고려시대 고종 원종 충렬왕 등 3대에 걸쳐 왕을 섬기며 강직한 충신으로 알려진 담암 백문절로 시호는 문간이다. 백문절은 고려 고종때 과거에 급제하여 왕의 교지나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관청인 한림원에 들어간 후 한림원의 최고위직 중서사인이 되었다. 그 후에 이부시랑과 국자제주라는 관직을 역임했다. 1269년 폐위되었던 원종이 복위하여 중국의 원나라에 들어갈 때, 외교문서인 표문을 백문절로 하여금 짓게 했는데, 원종이 폐위사실을 숨기고자 함에 붓을 놓고 통곡하며 호소한 끝에 사실대로 기록했다고 한다. 그 후 고려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의 국학대사성·왕족직속관청 책임자인 보문각학사가 되었다.
백문절의 아들인 백이정은 고려 때의 성리학자이다. 호 이재 시호 문헌으로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충선왕을 따라 연경에 가서 10여년간 머무르며 주자학을 연구 통달하고 돌아와 이제현,박충좌 등 제자를 가르킴으로써 우리나라 성리학을 전파 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충선왕 때 상의회의 도감사가 되었고 뒤에 상당군에 봉해졌다.
남포백씨는 신라 헌안왕 때 현단위로는 백씨 중에서 최초로 관직에 오른 백중학을 시조로 역사적 사실이 명확하며 1천 2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자부심을 갖고 남포관향을 지키면서 충신 공신 유학자 등 역사적으로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하여 나라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