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위씨의 시조는 회주군 휘경이다. 공은 당나라 한림학사로 638년 신라 27대 선덕여왕 7년에 도예지사로 동래하여 벼슬이 아찬에 이르렀으며 고려 때 회주군으로 추봉 되니 회주는 곧 장흥이다. 그러나 약 300년간의 세계 실전으로 고려 초기 대각관 창주를 중시조로 삼아 세계를 잇고 있다.
5세 계정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종·숙종·예종 등 4조에서 삼중대광,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이부사, 상주국 등을 역임했다. 타계하자 충렬 시호와 함께 예종묘정에 배향됐다. 또한 고려 고종 때 원개·문개·신개 3형제는 예부시에 장원급제하고, 원개는 한림학사 추밀원부사로 활동하다 출가, 정혜사에 있을 때 원나라 황제에게 청전표를 올려 송광사의 징발된 토지를 회복시켰다.
그가 입적하자 충렬왕은 원감국사 시호를 내렸다. 조선조에서는 합문판사였던 충이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불복하였다. 하여 출사자가 200년간 없었으나 그 후부터는 문·무과 급제자가 배출되고, 특히 임진 및 병자 양란에는 호남모곡도유사 대용은 형조참의에, 덕의도 병조참의에 추증, 해남현감 대기는 호서수군절도사에, 언양현감 덕화는 호조판서에 의주부윤 한량, 북도능전지를 저술한 창조는 호조참의 등 무공이 지대하다. 또한 호남 실학의 거목, 옥과현감 백규는 9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