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이 따갑습니다. 그 햇살에 속살을 드러내고 웃는 것은 노랗게 익은 늙은 호박입니다. 봄이 되면 농작물마다 자리가 있지만 호박은 자리가 없습니다. 풀이 자란 후미진 자리에 씨 몇 개를 삽으로 푹 파서 아무렇게 심습니다.
호박은 걸음만 잔뜩 주면 비 맞으면서 잘도 큽니다. 비 오는 날을 골라 싹을 틔우고, 보름날에 달덩이 같은 호박 꽃이 피고, 소나기가 한바탕 지난 다음날에 때깔 좋은 애호박이 탄생하고, 할머니 다리 같은 줄기 끝에 노랗게 익은 호박 덩어리가 아름답습니다.
“호박 꽃도 꽃이냐?”라고 비아냥을 받지만 호박은 “난, 괜찮아” 기죽지 않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감으로 살아왔습니다. 시장에 파는 호박잎까지 넝쿨 채로 복을 주고는 생색 한번 내지 않는 보살님 같은 고운 마음을 가진 꽃입니다.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차근차근 살아갑니다.
5월 담장에 아름답게 핀 장미는 벌써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주인은 열린 대로 따서 먹고, 손이 안 가면 자신도 모르게 늙어 가지만 원망 한 번이 없습니다. 이제 맷돌 같은 호박은 담장 위에서 무거운 자태로 가을볕을 쬐고 있습니다.
호박 꽃은 언제나 후덕한 큰누님 같은 꽃입니다. “열심히 노력해도 아무것도 얻지 않도록 하여라.” 발보리심(發菩提心)을 바라는 사부대중에게 어느 고승이 하신 말씀처럼 호박은 결과에 연연하지 않은 행동을 합니다.
남을 이겨서 조금이라도 인정받고 살아가고 싶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잘나지는 않았어도 건강한 심신으로 힘들다 말하지 않고 편안한 넓은 가슴으로 둥글둥글 살아갑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은 호박도 모르는 것이 분명합니다. 늙어 보이지만 호박 자신은 절대로 늙었다고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호박에게 나이 느는데 지침이 되어주는 이웃은 없습니다. 나는 호박이 자기 몸에 짙은 검은색을 보고 나이 듦을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지는 싸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