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조씨의 근원지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북구 번동인데 선계는 실전되어 상고 할 길이 없다. 시조로 모시는 조잠은 고려때 양주호장을 지내고 판중추원사를 증직받은 판원사공인데 조지말의 후손으로 군우의 손자 경질의 아들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양주조씨는 판원사공 1세조 잠과 2세조 호판공 인필 3세조 서운관정공 의로 3대에 이르기까지는 독신으로 선계가 이어 왔으나 서운관정공 조의는 고려조충신으로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맏이가 정평공 조계생이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강화공 조유중이 강화부사 불가로 귀의한 조설우대사, 문강공 조말생이 영중추원사 예문관 대제학, 제학공 조종생이 병조참판 제학을 지냈는데 5형제의 아들중 문강공 말생의 후손이 가장 많이 번성하여 양주조씨중 다수의 후손인구를 이루고 있다.
정평공은 아들 병조판서 극관, 평안도관찰사 수량, 제학공은 아들 병기녹사 번과 손자 계동, 향동, 귀동 등이 조선 단종조 계유정난때 목숨을 잃어 후손의 인구가 적다. 양주조씨는 조선조에서 문과급제 97인, 무과급제 71인, 생원진사 244인, 상신 8인, 대제학 5인, 인조장열왕후를 배출하고, 국구 1인, 의빈 2인, 청백리 1인, 충절 13인, 효열 32인, 재상급 26인을 비롯하여 천여명의 관료가 나온 조선시대를 통하여 명문벌족으로 이름을 얻은 가문으로, 특히 1905년 대한제국때 을사늑약을 반대 상소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순국한 원임의정대신 충정공 조병세선생은 양주조문의 명예를 선양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