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사랑방] 우리 소중한 삼 남매 이야기
상태바
[다문화 사랑방] 우리 소중한 삼 남매 이야기
  • 한미숙(일본)
  • 승인 2022.11.07 09: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문화가족사랑회와 함께 하는 ‘결혼이주여성 한국생활 정착기’(152)

1995년 11월 18일, 나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위해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한국말은 한국요리, 사회생활을 하면서 배웠다.

결혼생활은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시어머님을 옆에서 보면서 한국 생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된장, 마늘, 김치 냄새를 싫어하게 되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시어머님한테 말씀드렸는데, “그런 일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시누이가 같이 가줘서 산부인과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아직 한국에서의 삶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에서, 임신까지 하게 되니, 일상생활이 많이 힘이 들었다. 결혼을 늦게 하긴 했지만, 아이를 쉽게 임신했다. 첫째를 낳고, 둘째까지는 8개월, 둘째에서 막내딸까지도 아이를 가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96년 12월 31일, 그리고 1998년 5월 20일, 2000년 11월 28일, 든든한 첫째 아들과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둘째아들, 그리고 예쁜 막내딸을 낳았다. 거의 연년생으로 태어난 2명의 남자아이를 키우면서, 육아를 시작했다. 큰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둘째가 태어났기 때문에, 첫째아이가 질투를 심하게 했다. 첫째아들이 해꼬지를 해서 둘째의 귀에서는 자주 피가 나곤 했다.

그랬던 큰아들도 시간이 지나 유치원에 가게 되었는데, 장난끼가 무척 심해서 유치원에 가서도 2~3일에 한번 뒤에 서서 벌을 받았다고 한다. 첫째가 유치원에서 그렇게 심하게 장난을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유치원 원장님을 뵙고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첫째아이의 머리가 아주 좋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검사결과 그렇게 나왔던데 저는 신기했다.

그러한 장남의 장난끼는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창피해서 머리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던 적이 많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소풍을 가서 처음으로 담임선생님을 직접 만나서 너무 반가워서 인사 드렸더니, 큰아이가 친구가 싸우는 바람에 버스가 움직여서 사고가 났다며 나를 혼내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 당시에 나는 1학년 2반 부모 모임에 들어가 있었던 덕분에, 같이 모임을 하던 다른 어머니들이 나를 감싸주었다. 우리 아이가 다른 학생하고 싸우는 바람에, 한 아이가 버스에서 넘어지면서 엔진을 끼고 있어서 움직이게 되어, 뒤에 주차되어 있던 다른 버스에 부딪혔다고 하시면서, 첫째 아이의 담임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많이 화를 내셨다.

그 이후에 학교 참관 수업에 가도 담임 선생님께서는, “어머니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하시면서, 수업시간에 아이가 너무 시끄럽게 해서 수업 진행이 어려우니 아이에게 수업시간에 조용히 할 수 있도록 지도 부탁드린다고 말씀하셨다. 둘째 아이 또한 학교에서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뛰어다니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큰 아이는 장난하다가 치아가 깨질 때도 있었고, 큰 아이가 남의 아이의 등을 때렸다고 그 부모가 화가 나서 자신의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라고 집으로 찾아 온 적도 있었다.

4학년이 되자, 큰 아이를 잘 이해해주시는 젊은 여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아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매일매일 축구를 하여, 자주 얼굴이 새까맣게 타고는 했다. 큰 아들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니까 선생님한테 칭찬도 받고, 아이가 차분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너무 힘들어서 일본에 있는 심리 상담사에게 전화하여 도움을 받곤 했었다. 누구 울면 우리 아이가 놀고 싶어서 밀으니까 울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참을 수 밖에 없었다. 큰아들이 끝나면 작은 아들의 사춘기에 들어가고 있었다. 컴퓨터 게임에 빠져, 아들에게 “엄마 꺼져”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매일 아침 학교도 겨우 깨워서 보내고, 학교에서 벌점이 너무 많이 쌓여서 교장 선생님하고 다른 몇 가정의 부모 아이들 하고 산에 등산을 가야 했다. 그래야 그 벌점을 없앨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이 나는데,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계속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는 것을 반복했다. 그렇게 힘든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갔지만, 그런 산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다시는 못 갈 것 같다.

두번째를 군생활을 보내는데 훈련소에서는 진짜 재미있게 생활했는데, 강원도에 가서 자대생활을 시작하고 체중이 10kg나 빠지고, 밥을 먹어도 대부분 토해서 군에서의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군대에 있는 윗사람과 상담을 하여 군에서 나와 남은 기간을 공익복무요원 생활을 통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둘째 아들과 2살 차이나는 우리집의 예쁜 막내 딸도 있다. 막내 딸은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가기 싫어서 고생했다. 다행히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선물도 주시고 한국어 쓰기는 완벽하게 못 해서 남아서 수업을 하기도 했다.

큰 아이도 그렇게 학교에 보내서 완벽하게 한글을 배워서 못 보냈다. 한국에서 배워서 보내는 것을 몰라서 힘이 들었다. 학교 갔다 와서 같이 받아쓰기 공부를 했다. 4학년쯤 되니까 따라 갈 수 있었던 기억이 있다.

딸은 두번째 오빠가 학교를 늦잠을 자서 못 갈 때 깨워주고 도와주기도 했는데 어떤 날부터 흰쌀만 먹으니까 우리집은 현미쌀 다른밥을 먹을 때 따로 따로 해야되는 고생은 이었다. 음식을 가려서 힘이 들었고 학교급식을 많이 버렸던 모양이다. 딸은 음식 때문에 고생했지만 대체로 수월하게 자랐다.

행복이라는 것은 큰 것이 아니고, 아이들과 맛있게 음식을 만들어서 함께 먹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떡볶이에 오뎅을 많이 사가지고 넣고, 에어프라이기로 감자 고로케를 만들어서 아이들과 함께 먹었다. 말도 거의 통하지 않는 한국땅에 와서 아무것도 모르고 아이를 키우면서 장난꾸러기 때문에 참고 살았던 그 시기가 때로는 그립다.

정말 어떻게 아이들을 키워야 될지를 고민하면서 경제적인 형편이 그리 넉넉치 못했기 때문에 우리집은 아이들을 사교육도 거의 시키지 못했다. 아이들은 엄마가 공부를 많이 안 시켜서 좋았다고 이야기 하곤 한다. 그래도 나는 시험이 끝날 때마다 집에서 고생한 아이들을 위한 파티를 열어 주었다. 자신이 노력해서 시험을 열심히 봤다. 그것이 내가 아이들에게 파티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였다.

오늘도 하루하루 아이들이 성장한다. 나도 같이 성장하고 늙어간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의미가 아닐까?

건강을 잃으면 그것은 정말 슬프다. 건강하게 웃으면서 같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이 지금 나에게 있어 작은 행복이다.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아토피를 이기는 면역밥상
우리 단체를 소개합니다
임영호의 조합장 일기
풍경소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