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이신 중윤공 휘 인보의 출생연대나 창성연대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시조 중윤공께서 정조사로 송경에 가서 머무르시던 중 병환을 얻어 그곳에서 돌아가시자 아들인 문하시중공인 휘 송국께서 애통해하시다가 천리부시하시어 고향인 창녕에 가시던 중 현풍현에 이르자 눈이 많이 내렸다. 그래서 청산원의 바깥채 마루에 시신을 모시고 잠이 들었다. 새벽에 깨어보니 밤새 눈이 많이 내리고 이상하게도 시체 주변의 눈 위에 범의 발자국이 있어 이상이 여긴 시중공께서 범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았더니 지금의 맥산 묘소 자리까지 와서 범의 발자국은 끝이 나고 자리 한 잎 넓이만큼 눈이 녹아 있어 그 곳에 중윤공의 장례를 모시니 이곳이 바로 자손만대 불절의 명당이다.
우리 성씨는 시조 중윤공의 아들이신 문하시중공 휘 송국께서 판서공 휘 공필과 찬성공 휘 한필 형제를 두셨다. 이 형제분 중에서 판서공파와 찬성공파로 크게 나누어졌는데 판서공파에서는 육세에서 십파가 형성되었고 찬성공파에서는 육세에서 삼파가 형성되어 도합 십삼파가 되었으며 현재 십삼파가 되었으며 현재 십삼파의 자손들이 전국에 이십여 만명이 분포되어 있다.
후손으로 역사에 유명한 분은 사육신 중 한분이신 성삼문을 비롯하여 문묘에 배향된 성혼을 위시하여 상신이 7인이요, 충신을 비롯하여 청백리 또는 고관대작을 지낸 분은 부지기수다. 학식과 덕망으로 추대되어 역사와 국민 앞에 스승이 되시는 분으로 전국 서원에 배향되신 분도 많이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