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뿌리] 사군일백 배출해 청백리의 명가로 선 '현풍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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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뿌리] 사군일백 배출해 청백리의 명가로 선 '현풍곽씨'
  • 조연경 기자
  • 승인 2022.12.22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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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중한 석탑의 몸체와 왼쪽의 조형물은 현풍곽씨 문중의 명현과 충신등 자랑스러운 선조들께 바치는 후손들의 공경심을 상징하고 그 위에 크고 밝은 태양은 가문의 영원한 광영을 형상화

현풍곽씨의 시조이신 곽경은 17세의 젊은 나이에 팔학사: 곽경, 신경, 하경, 지경, 노경, 원경, 경경, 장경의 수장으로서 이분들이 이끌고 노국공주와 함께 살기좋은 동방의 고려국에 래사 하시어 인종 16년 과거에 급제하신 후 누진하사 최고위직인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종일품 평장사 등을 역임하시었고 포산군에 봉해짐에 따라 본관을 포산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조선조에 이르러 지명이 포산 현에서 현풍 현으로 개칭 됨에 따라 본관이 현풍으로 변경되었다. 고려조에서는 명현인 팔학사를 기리기 위하여 평양 대동강 석벽상에 팔경대라는 석비를 세우고 그 뒷면에 팔학사들의 시를 모두 새겨 넣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 곽문은 고려조에서 네 분의 포산군과 한분의 포산백을 받으시므로 사군일백을 배출함으로서 훌륭한 청백리의 명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조선조에서는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사재를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지휘하여 왜병을 물리치고 란을 평정하는데 혁혁한 무공을 세우신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천강홍의장군은 우리역사에 길이 남을 불 세출의 영웅이시며 애국충신으로 오늘날까지도 우리 곽문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으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다. 또한 현풍곽문은 고려조 때부터 도덕가문으로 일컬어 왔으며 조선조 때 일문삼강과 십이정여문 현곽팔주로 영남일대에 널리 명성을 떨쳤다. 이 같은 전통을 이어가기 위하여 우리 후손들은 고려조부터 전해온 충효세업 청백가성의 문훈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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