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뿌리] 나라의 위기에 수병장이 되어 힘쓴 '안악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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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뿌리] 나라의 위기에 수병장이 되어 힘쓴 '안악이씨'
  • 조연경 기자
  • 승인 2023.01.05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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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은 절개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안악 이(李)씨의 지조있는 역사를 모태로 하여 예술적으로 재구성 하였다.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켜 나가는 꿋꿋한 의지와 기개가 후세에 긍지와 자부심으로 영원 하라는 염원을 담아 승화시킨 작품이다.

안악이씨 시조는 이 견(李 堅)자 이시다. 고려 공민왕 9년에 홍건적이 침입해옴에 검교문하대승 상장군으로 출전하시어 함종에서 순절하시니 이를 대군이 의분하여 대승을 거두니 안악군에 봉해졌다. 2세 정림은 봉선대부를 지냈으며 황해도 안악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면서 가세를 일으켰다. 3세 의만은 광정대부 문하찬성사로 보임되었으며 고려 말 혼란기에 허물을 입고 경상도 창원으로 유배되셨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치시게 되니 후손들이 영남지방에 터를 잡아 살아오고 있다. 4세 흥부는 밀양에서 흥인은 진주에서, 침입해온 왜구를 섬멸해 지병마사와 만호로 임명되었고, 흥부의 아들 설은 예조참의, 흥인의 아들 호는 예조판서를 지내셨다.

계을은 정순대부를 지냈으며 계을의 손자 구관은 봉정대부 안악군수를 지낸 뒤, 괴산군에 터를 잡아 살게 되자 이 지역이 안악 이씨의 새로운 세거지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당해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운기, 운장 형제는 의병을 일으켜, 운장은 곽재우 막하에서 수병장이 되어 경남 의령 정암진에서 차단, 호남 진출을 저지하고 순절하니 병조참의로 추증되시어 충익사에 모셔져 있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뒤, 용운은 해군작전국장과 해군참모총장을, 용문은 육군작전국장과 수도사단장을 역임하시고 남부지구경비사령관에 보임되었다가 전남 운봉에서 전사하였다. 용문은 군인 박정희가 가장 존경하셨던 분으로,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 옛 상관을 기리는 승마대회를 육군사관학교에서 개최하게 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시조공을 모신 일원제가 경남 의령군 궁류면 다현리 지동에 있으며, 그 경내에 시조공의 신단비와 선조 5대 7위 단비를 모신 봉단이 있어, 해마다 전국의 종원들이 모여 시향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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