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뿌리] 맹자의 후예 '신창맹씨'
상태바
[가문의뿌리] 맹자의 후예 '신창맹씨'
  • 조연경 기자
  • 승인 2023.02.09 09: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조 명재상인 맹사성의 청백한 이미지를 선비의 갓과 대나무로 표상하여 가문의 역사성을 상징함. 전체적인 작품구성을 통해 선조와 후손이 화합하고, 나라와 가문의 번영과 발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문(門)의 형태로 형상화함.

신창맹씨는 아성공 맹자의 후예로 한국지파의 원조는 맹자 40세손 승훈으로 당이 멸망할 때 정란을 피하여 왕래가 빈번하였던 기량천을 거처 도래한 것으로 알려져 이후 신창이 맹씨의 본관이 된 유래이다맹씨는 선계  시중공을 비조로, 고려 충혜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한 공훈으로 신창백에 훈봉된 휘  이부전서공이 시조이다.

2세는 휘 () () 두 분으로 유는 이부상서를 역임한 상서공으로 고려 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다 두문동에서 순절한 72현의 한 분 이며, 복은 공조전서를 지낸 전서공으로 관북파의 파조이다.

3세는 두문동 72현의 또 한 분이며 수문전 제학을 역임한 휘 희도 동포 공으로 아버지 상서공이 두문동에서 순절하자 구세거지인 한주(서천)를 거처 사돈 최영 시중공의 옛집이 있는 온양 금곡촌으로 옮겨 은둔 생활을 하면서 후학을 모아 강론하니 이곳을 행단이라 이르고 현재 국가사적 제 1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조가 온양 행차 시 공의 묘소에 치제를 지내고 충효세업. 청백가성의 어필사액을 내리니 맹씨 문중의 영광이요 명예로다. 4세는 휘 사성 문정공이다. 공은 고려조 최영 시중공의 손서로 우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 한 후 우헌납을 역임 중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수원 판관으로 출사 태조 정조 태종 세종 등 4조를 섬기면서 많은 업적을 남긴 현신이다.

특히 공은 조선조의 대표적 청백리일 뿐 아니라 백성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눈 서민적 정승으로 많은 일화가 전하여지고 있다. 5세는 휘 귀미 감찰공이고, 6세는 휘 효증 중추부사와 휘 계증 형제로 효증은 자손이 무후하고 계증은 공조참판에 증직된 신원군이다. 7세는 휘 석흠, 석경, 석준, 석린 네 분이나, 석린는 자손이 무후하니 이후 신창군파 석흠, 사직공파 석경, 호군공파 석준 3파로 분파되어 2세 분파인 관북파를 포함 파로 나뉘어 대대로 많은 등과 현관 공신 효자 효부 등을 배출한 우리나라 유수의 명문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맹씨문중은 충효세업 청백가성을 종훈으로 충효, 청백, 충신, 접례, 수절 등 선조의 유훈을 널리 계승 발전 시키고자 여기에 유래비를 세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아토피를 이기는 면역밥상
우리 단체를 소개합니다
임영호의 조합장 일기
풍경소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