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뿌리] 충헌공 양기 선생을 모신 논산 충헌사 '청주양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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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뿌리] 충헌공 양기 선생을 모신 논산 충헌사 '청주양씨'
  • 조연경 기자
  • 승인 2023.03.0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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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양씨의 시조 楊 起는 원나라 금자광록대부중서성정승으로 계실 때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한 고려태자령정이
즉위차 환국할 때 노빈도령으로 공주를 배종하여 동래하였으며 그후 만 백성의 적폐였던 세공(동녀 5천인, 준마 3만필, 비단 3만동, 저포 6만필 등)을 삭감하여 그 빛나는 공훈으로 나라에서 삼중대광보국 숭록대부 및 상당백을 봉하고 본관을 청주로 사관하여 청주양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 작품은 청주양씨의 시조 양 기의 세공삭감의 공훈처럼 청렴하고 결백하며 바른 삶을 살아온 대쪽같은 기상을 표현하고자 대나무의 마디를 인용하였다. 작품의 하단에 구름을 깔아 수직으로 곧게 뻗어 구름 위 하늘까지 닺는 청주양씨의 바른 청렴한 기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시조 양기는 본래 중국의 홍농양씨로 후한 때 사지공이라 칭했던 양진의 43세손이다. 양기의 자는 가윤이고 호는 암곡 원나라에서 태어나 등과했다. 원나라 조정에서 금자광록대부 도첨의정승으로 재임 중에, 노국대장공주가 공민왕과 혼인하면서 1351년 12월 공주를 배행해 고려로 오셨다.

고려에 들어와 많은 공적을 남겼는데 당시 중국에 보내는 동녀 5천인, 준마 3만필, 비단 3만동, 모시 6만필의 사대세공을 삭감 받아 그 공훈으로 벽상삼한창국공신 청백리 상당백에 봉해지고 청주, 해주, 송화를 식읍으로 받았다. 이때 관향을 청주로 하사받아 청주양씨의 시조가 됐다.
만년에 벼슬을 마치고 송화 묵산에서 지내다가 홍무 갑술 칠월에 졸했다. 임금이 시호를 충헌으로 내리고 양기의 유상을 비단에 그려 하사하는 한편, 수증사 동편에 충헌공 영당을 짓게 하고 지역의 선비들에게 제사를 모시라 했다.
이후 좌부승지 이상신이 왕의 윤허를 받아 양기의 후손들에게 군역과 잡역을 영원히 면제하는 수교문을 내렸다. 후손과 지역의 선비들이 노성, 보성, 창녕에 충헌사를 창건해 청백리 정신을 기리고 있으며, 논산 충헌사는 2007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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