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뿌리] 영남과 호남에서 뿌리를 내린 '청안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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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뿌리] 영남과 호남에서 뿌리를 내린 '청안이씨'
  • 양민규 기자
  • 승인 2023.06.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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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수직으로 뻗어 있는 양갈래의 모습으로 청안이씨 문중의 두 파를 상징한다.또한 문중의 화합과 번영을 표현하고자 인간의 어울어지는 모습으로 표현되도록 디자인하였다.청안이씨의 후손들이 항상 화합과 단합, 맑고 청렴한 기상을 갖추었음을 의미를 두고자 했으며,중앙 상단에 바람과 태양, 하늘을 표현하여 문중의 고귀하고, 청아한 이미지를 담아 우리의 후손들이후대에도 더 나은 미래로의 번영과 화합을 상징하고자 한다.
이 작품은 수직으로 뻗어 있는 양갈래의 모습으로 청안이씨 문중의 두 파를 상징한다. 또한 문중의 화합과 번영을 표현하고자 인간의 어울어지는 모습으로 표현되도록 디자인하였다. 청안이씨의 후손들이 항상 화합과 단합, 맑고 청렴한 기상을 갖추었음을 의미를 두고자 했으며,중앙 상단에 바람과 태양, 하늘을 표현하여 문중의 고귀하고, 청아한 이미지를 담아 후손들이 후대에도 더 나은 미래로의 번영과 화합을 상징하고자 한다.

본관인 청안(淸安)은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이다.

시조는 이한번(李漢霧)이고 고려 충열왕 때 문과에 합격하여 한림원 학사에 이르렀다. 1821년에 발간된 족보에 의하면 한림공은 1283년에 태어났고, 이색(李穡)이 중국 원 나라에 들어가 과거를 볼 때 이색의 과거응시를 도왔으며, 홍건적 모거경이 침입하자 안유(安裕),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격파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추성보리공신삼중대광정일품을 받았고 청안백(淸安伯)으로 봉해졌다. 말년에 공민왕 12년 즉, 1303년 김용(金鑛)등의 반란으로 전남 영광군으로 숨었다가 85세로 사망하였는데, 묘는 후에 전남 나주군 여황면 왕산동으로 이장한 것으로 보이고 용진산 왕잔등 산줄기가 도선산이 되었다.

청안이씨의 후손들은 전라도와 경상도와 경기도에 약 3만 명이 살고, 전라도파 후손은 장성을 거쳐 나주(구 광산군 본양면) 전북 등지로 옮겨 살았다. 이를 전라도파라 한다. 영남의 안강(安康) 지방에도 청안이씨가 벌족을 이루고 있는데, 양도파가 대동보를 못하고 있는 원인은 시조 한림공(翰林公=漢藩)의 남쪽으로의 사실상 피신에 의하여 그 자손이 5-6대를 계대치 못한 궐대론(鬪代論)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애석하지만 그러나 양도파는 청안이씨로서 600여 년을 살아온 같은 자손임이 분명한 것이다. 선조 시대에 석탄공(石灘公) 이기남(李箕南)은 성리학에 몰두하여 벼슬을 마다하고 송강 정철과 회유하여 선조대왕이 장성에 불태산을 하사하였는데, 그 곳에서 초막을 짓고 시를 낭송하여 그 초막 이름을 정리암(鄭李菴)이라 하였고, 그 아들 기호공(岐湖公) 이문룡(李文龍)은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위한 공으로 임진공신으로 녹권이 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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