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뿌리] 백제 의자왕의 후손 '부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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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뿌리] 백제 의자왕의 후손 '부여 서씨'
  • 양민규 기자
  • 승인 2023.07.07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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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국 시조이신 온조왕의 역사성과 6대왕제를 왕손으로 참여하여 종헌관과 후손의 소임을 다하는 부여서씨의 상징을 향로로 표상하여 백제의 기상을 표현하였으며, 전체적 세면은 삼문중의 웅비와 비상을 조형적으로 표상하였다.
백제국 시조인 온조왕의 역사성과 6대왕제를 왕손으로 참여하여 종헌관과 후손의 소임을 다하는 부여서씨의 상징을 향로로 표상하여 백제의 기상을 표현하였으며, 전체적 세면은 삼문중의 웅비와 비상을 조형적으로 표상하였다.

백제국 시조이신 온조왕의 역사성과 6대왕제를 왕손으로 참여하여 종헌관과 후손의 소임을 다하는 부여서씨의 상징을 향로로 표상하여 백제의 기상을 표현하였으며, 전체적 세면은 삼문중의 웅비와 비상을 조형적으로 표상하였다.

부여서씨는 백제국 건국 이후 31대 의자왕 때에 이르러 신라와 중국의 당나라 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서기 660년 백제국이 망하니, 의자왕은 태자인 융(隆)을 비롯 대신 등 88인이 당군에 의하여 입당하게 되었다. 의자왕은 입당 후 1년이 못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중국 북망산에 안장하였다.

한편 당 고종은 의자왕의 태자인 융에게 본성인 부여씨(扶餘氏)를 고쳐 서씨(徐氏) 성을 사성(賜姓)하고 웅진(지금의 공주) 도독을 삼아 백제군(百濟君)에 봉하므로 공은 웅진도총관이 되었다고 전하며 68살에 중국에서 죽어 서기 682년 12월 24일에 중국 북망 청선리에 예장하였다.

그리하여 본래의 성인 부여(扶餘)를 본관으로 삼아 문호가 열리게 되었고, 고려조 후기 병부상서를 지내고 태원군(太原君)에 봉해진 존(存)을 1세조로 하여 세계가 이어왔으며 이후 종중은 조선조에 이르러 크게 번성하여 3문중 산하 22파로 번성하였다.

백제의 고도 부여에서는 백제문화를 빛내던 6대왕(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의자왕) 제(際)가 매년 능산리에서 봉행되고 부여서씨는 헌관으로 참여하여 후손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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