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송씨의 본관은 경남 합천 야로현으로 지금의 합천군 야로면 구정리이다. 시조 맹영(孟英)이 고려 목종 때(997-1009) 간의대부의 품계와 총부의랑의 벼슬로 야성군(冶城君)으로 봉(封)해지면서 식채로 받은 곳이다. 야성은 야로의 고려 때 지명이다.
창씨는 천년의 긴 역사를 가졌지만 유감스럽게도 상대(上代) 9세까지의 분산(墳山)을 실전하게 되어 유지로 알려진 합천군 야로면 구정리에 1941년 봄 9세까지의 신위를 모신 제청과 망묘단비를 세워 구정재(九政齊)라 편액하고 한식에 세제(歲祭)를 올리고 있다.
10세에 이르러 절도공파(節度公派)와 감사공(監司公)파로 분파되니 절도공 분묘도 실전되어 칠곡 도촌에 망묘단비를 세우고 음력10월 1일 향제하고 후손 사직공파는 칠곡에 첨정공파는 성주에 선략공파는 용인 등지에서 살고 있다. 감사공 이하 5세는 성주 회동의 선영하에 1656년 제실 추원당을 세우고 음력 10월 5일 묘제를 올리고 직장공파 후손은 성주에 상호 군공파는 산청에 대호군공파는 대구에 현령공파는 영주에 선전공파는 칠곡등지에 살고 있다.
야성송문은 11세 길창(吉昌) 선조까지는 고려조에 12세 이후는 조선조에서 많은 대소과에 등과해서 여러 관직에 봉직했으며 15세 눌제(訥齊) 석충(碩忠)은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면서, 한국 성리학의 맥을 잇는데 기여를 했으며, 16세 야계(倻溪) 희규(希奎)는 투철한 충효 사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기고, 을사명현으로 후에 이조판서로 증직되고, 고종 8년에 충숙의 시호를 받고, 불천위로 모셔졌다. 그 후 구한 말 성주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공을 세운 이력은 역사 사료에 남아 있기도 하다.
야성 송문의 조상들은 투철한 충효정신과 도덕을 몸소 실천하고, 그 숭고한 정신을 후손에게 남겨 주었다. 능력 있는 사람은 긍지가 있고, 긍지를 가진 사람은 훌륭한 조상을 뫼시고 있는 법이니, 훌륭한 조상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실천하고 후세에 물려주고 있다.